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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Nov 09. 2021

방랑의 여정- 거창에는 사람이 산다


거창에는 사람이 산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용규 씨는 소위 ‘왕따’이다. 공동체인 대구를 떠나 낯선 이방인으로서 거창을 찾아들었다. 공동체를 떠났다 해서 용규 씨는 병약한 은둔자가 아니다. 자신의 현실과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대구를 떠나 스스로 왕따가 된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도시 생활을 저버리고 소박한 자연을 찾아 스스로 왕따가 되었다. 용규 씨는 말한다.

 

“사는 것에는 면역성이 없네요. 온갖 백신도 무효입니다. 일이 벌어지면 그저 당할 수밖에 없네요.”


비가 오고 바람 부는 날에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 돌아오는 길이 무거워 보여도 일단 떠난다. 무엇을 찾으려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흔히 발생하는 만족과 불만족의 문제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거창으로 가는 길. 대전까지는 기차를 탔다. 옆자리 손님이 자꾸 거슬린다. 그는 시간에 갇혀 있는 구속자처럼 보인다.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전까지 가는 내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한다. 그의 마음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을 것이다. 소란스러운 마음은 잠들어 있는 마음이다. 그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놀라운 가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꿈꾸지 못한다. 눈이 있어도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세상을 듣지 못할 것이다.



거창에서 덕유산 자락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다. 산에서 내려가는 모양새가  다소 불안해 보인다. 갈지자걸음에 가끔은 숨을 몰아쉰다. 그러면서도 용규 씨는 연신 ‘문제없다’라고 장담한다. 아까 마신 술이 조금 과했나 보다. 나는 용규 씨의 주량을 알기에 천천히 마시라고 권유도 해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다. 도수 약한 막걸리를 마시다가 갑자기 주종을 폭탄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원샷으로 마시는 것이다. 용규 씨는 거창에 와서 술이 많이 늘었다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주량이 갑작스레 대폭 늘어난 데는 사연이 있기에 말리지는 않았다.


산에서 내려가는 내내 용규 씨는 말이 없다.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동시에 말을 그친 것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가을이 주는 미세한 소리를 듣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방랑은 침묵이다. 침묵하지 못하는 자는 방랑자가 될 수 없다. 말이 없다고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으로 지껄이는 것도 멈출 때 진정한 침묵이 찾아온다. 침묵은 곧 마음의 평정이다. 마음이 고요할 때 세상이 들려주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고로 방랑자는 세상의 진정한 소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숲이 소란스러워진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며 숲속에 쫙 깔린다. 오솔길을 걷던 나는 그만 발길을 멈춘다. 숲이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에 귀를 기울였다. 나뭇잎들의 아우성을 뚫고 어디선가 비음이 들린다. 새소리이다. 나뭇잎들의 반주에 새들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아, 가을의 소리. 가을이 지나가는 소리에 한참을 서성거렸다. 가을은 그리움과 설렘으로 이어지는 계절이다. 나는 그만 가을의 소리에 눈을 감아 버렸다.


용규 씨는 이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화려한 도시 대구에서 살다가 올 초부터 산골 마을 거창에 자리 잡았다. 거창에는 일하러 왔다. 필리핀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인 등 외국인들 틈에 끼어서 공장에 다닌다. 가끔 휴일도 쉬지 않고 공장에 나간다.


“여긴 희한한 동네입니다. 일거리가 넘쳐요. 대구에서는 일거리가 별로 없는데.”


용규 씨의 말과는 달리 대구에서 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도 거창한 광고장이의 이력을 자랑하는 용규 씨에게는 심심치 않게 일거리가 들어왔다. 그런 그가 갑자기 거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머무르며 애쓸 곳이 아닌데 그리하면 이름이 꼭 욕됨이 있다’라는 주역의 한 구절을 필히 생각했을 것이다.


용규 씨가 대구를 떠난 이유는 사람을 믿고 일을 추진했다가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용규 씨는 한탄했다.


“주변 사람도 함께 피해를 보았습니다. 덩달아 주변 관계가 어색해졌습니다. 영혼이 타들어 가는 아픔을 겪었지요.”


관계란 거울이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품고 있는 생각을 정확하게 펼쳐 보이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 관계가 어색해졌다는 것은 용규 씨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용규 씨에게 삶이란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비어 있어서 남을 이용하려는 욕망이 없다는 말이다. 남을 속이지 않는 자가 흔히 겪는 것은 역설적인 얘기지만 남에게 쉽게 속는다. 사는 것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꾸미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즉 논어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지언(知言)과 지인(知人)의 문제였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라는 지언과 지인은 어려운 경지이다. 붓다에게도 또한 같은 맥락의 말씀이 있다. ‘말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진실은 항상 언어 너머에 있다.


거창에 온 후 일과는 단순하다. 저녁 6시 퇴근 후에는 저녁 겸 생두부 한모를 안주 삼아 생막걸리 한 통을 마신다. 그리고는 색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린다. 하늘에 떠있는 우중충한 달, 보름달. 그믐달도 그리고, 마당에 핀 꽃과 잡초. 자주 찾아오는 들고양이도 그린다. 그리다가 스르륵 잠에 빠진다. 그게 일과의 전부이다.


“그림 그리다가 책상에서 곧잘 잠이 듭니다. 눈 뜨면 아침이지요.”


용규 씨를 단순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단순하다는 것은 어리석고 잘 속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단순함은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삶에 대한 달관 미, 때에 따라서는 경이감마저 느끼게 만든다.


성인이 되어서도 단순해지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단순함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 품성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많고 세속의 때에 묻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단순함이 깃드는 것이다.


그런데도 용규 씨의 단순함이 문제가 된 것은 사람을 너무 믿는 데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가면을 쓴다. 그런데 용규 씨는 그 가면을 현실로 오인한 것이다. 사람을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그 말은 명백히 틀렸다. 지옥은 분명히 메마르고 건조한 삶의 현장일 것이다. 지옥의 현장에서는 굳이 진리가 무엇인지 찾을 필요가 없다.  사는 의미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타인의 타인’이다. 내가 지옥이 될 수는 없다. 용규 씨 역시 그렇게 살지도 않았고, 살 수도 없다.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은 자신의 시공간 속에서만 갇혀 사는 자이다. 그곳에서는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대신 자기중심적인 소음과 상상력이 부족한 현실적인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와 공감과 연민이라는 이라는 단어도 매우 낯선 의미가 될 것이다.  티인을 ’지옥’으로 보는 사르트르를 거부하고, 타인을 ’우리’로 보는 용규 씨는 지금 거창에 있다. 타인이 아닌 우리는 다시 말하지만, 세상을 칸막이하지 않는다. 시공간의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공간은 문제가 되지 않는 영혼의 세계에서도 사르트르와 용규 씨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두 개의 철로처럼 평행선을 달릴 것이다.


오늘 같이  비라도 내릴 것 같은  날에는 떠나야 한다. 모든 게 낯설게 다가오는데 떠나지 않을수 없다. 배낭을 메고 거친오름을 올랐다. 거친오름이라 해서 거칠지는 않다. 며칠 전 다친 다리기 신경이 쓰일 뿐이다. 절뚝거리며 조심스레 정상으로 향했다.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안나 게르만의 ‘나 홀로 길을 가네’를 들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스산한 늦가을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 러시아 노래이다.


거친오름 정상에는 의자가 없다. 대신 제주의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억새가 무리 지어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억새 위로 눕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억새 사이로 스러져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환영은 분명 아니었다. 방랑자는 꿈을 꾸지만, 환상을 품지 않는 법이다.


주위 시계가 차츰 어두워진다. 마음은 가라앉는다. 고요해진 마음에 뭔가 꿈틀거린다. 꿈틀거림은 점점 온 마음을 휘감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람이 억새 위를 거칠게 지나간 지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것은 길을 잃은 영혼이었다. 나는 곧바로 땅에 주저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영혼에 보내는 초대장이다. 용규 씨에게도 보낼 것이다.


-거친오름 정상에는 바람이 분다


오늘처럼 시간이 무너지는 날에는

나는

그 바람을 만나러 간다


정상에 핀 억새는 바람에 스러지고

그림자만 남은 그 자리에 그리움이 쌓여가는데

그 말 없는 그리움 위에


그만

이야기를

비 오는 날 폭포처럼 쏟아 부어버렸다


너와 나는 온 세상

너와 나의 영혼이 바람결에 들려주는

갇혀 있었던 수많은 시간의 이야기를


너와 나의 영혼이 바람과 함께 기다리는

그리움과 설렘의 끝없는 이야기를-


초대장의  겉장에 제목을 단다. 거침없이  써내려간다.


'내가 속고 있다면 나는 존재한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데카르트가 이 말을 차용, 그 유명한 명언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외쳤다.

여하튼 아우구스티누스건 데카르트건 용규 씨는 존재. 그리운 존재이다.그리고 스스로 왕따이고. 속는자이다.


나는 용규 씨를 만나러 거창에 간다.

눈 내리는 날에는 거창에 갈 것이다.

삶이 낯설게 다가오는 날에는 거창에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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