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보철 Dec 05. 2021

방랑의 여정-가난한 베르테르의 슬픔


또 ‘꿈속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경직되더니,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다. 어디서 나오는 소리일까?


작은 방이었다. 옷과 잡동사니로 빼곡하게 채워져 사람 하나 들일 공간이 넉넉지 않은 작은 방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새벽녘에 울고 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다. ‘소리 내어 펑펑 울어야 하는데….’

 

누군가 아이에게 고통을 준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편견(관점은 모두 다 편견이다)에 따라 아이의 선택을 강요하고, 아이의 의사에 반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오히려 상대의 결정을 당당히 거부했다. 그것은 자신이 열망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이 열망했던 일에서 배제된 것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고통과 그 이유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하루 종일 헛웃음을 날리다가 결국에는 새벽녘에 고통이 울음으로 터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숨을 죽이며 울고 있다. 아이의 흐느낌에 한순간도 견디기 어려웠다. 가슴에 격한 통증이 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이었다.


고통과 죄는 한 가지로 이어진다. 아이가 고통을 받았다면 누군가 아이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의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고통을 준다는 것은 명백히 죄를 짓는 것이다. 누가 고통을 주고, 죄를 짓는 것을 허용했단 말인가? 그러한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난 감히 하늘에 대고 외친다.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그럴 권리는 없다.


강조하건대 그것은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육체적으로 위력을 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강압하는 모든 것은 폭력이다. 폭력은 고통을 주는 것이고, 고통을 주는 것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누구든지 잠재적인 폭력꾼이 될 수 있다. 나도, 당신도 잠재적인 폭력꾼이다. 최근 70대 노파를 무릎 꿇린 이대 미용실 전단지 사건에서 보았듯이 알게 모르게 누구나 폭력을 자행하는 세상이다. 폭력은 우리 삶에 만연해있다.


폭력이 치명적인 것은 무엇보다 인간존재의 존엄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존엄이란 굴욕당하지 않을 권리다. 우리가 외면적으로나 또는 내면적으로나 누군가에 종속될 때 굴욕은 성립된다. 남들에게 의존하거나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우리의 존엄성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우리가 주체라는 사실을 무시당하거나 수단으로 악용당할 때 우리는 굴욕을 느낀다. 굴욕은 존엄성을 앗아가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폭력 없는 세상을 원한다. 비극적이지만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소망이다. 그런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방랑의 길로 들어섰다. 방랑은 존재 자체이고, 나는 존재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었다.

    

나는 자각몽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안다. 자각몽을 꾸는 사람은 꿈속의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자각몽을 꾸는 나도 공간이동이 안 되는 꿈이 있다. 속수무책으로 수십 년째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의 꿈을 꾸고 있다.


해 질 무렵, 언덕 위의 카페에서 전화를 거는 꿈을 매번 꾼다. 카페 문밖에는 공중전화기가 놓여 있다. 나는 공중전화기를 든다. 그리고는 중얼거린다.


‘아, 내가 또 이곳에 왔구나.’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마지막까지 번호를 다 돌린 적이 없다. 숫자가 부족한 이상한 공중전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저번 꿈에는 전화기에 4, 6  숫자가 없었다면 이번 꿈에는 2,5 자의 숫자가 없다. 채 돌리지 않은 전화기에서는 ‘뚜 뚜 뚜’ 하는 신호음만이 흘러나온다. 당연히 응답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꿈속에서만이라도 한마디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여보세요?’


부산 해운대를 찾은 적은 많았지만 ‘달맞이 고개’ 너머로 가본 적은 없었다. 고개를 넘어서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감이 항상 나를 엄습했었다.


바로 오늘이었다. 이제는 그 질긴 악몽을 끝낼 시간이 됐음을 직감했다. 수십 년째 같은 꿈을 꾸고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어나는 그 고통을 깨부숴야 한다. 새벽녘에 흐느끼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내 마음 깊은 곳을 강타한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또다시 실기(失期)할 것 같았다.


달맞이 고개를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척 무겁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뗐다. 전날 금정산 정상인 ‘고담봉’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에 다리를 접질린 탓이다.


‘저기쯤에 공중전화가 있었을 텐데….’


그런데 카페가 보이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카페가 버거웠는가 보다. 대신 그 자리에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다친 다리가 신경 쓰인다. 발목이 많이 부어올랐다. 카페건물 옆에는 나무들이 조그만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빈 의자가 놓여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부산 앞바다는 예전에도 늘 그랬듯이 에머럴드 빛으로 물들어 있다.

오후 늦은 시각, 그날도 오늘 같은 시각이었을 것이다. 햇살이  따사롭다. 눈이 저절로 감긴다.


입대를 앞두고 부산을 찾았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꼭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한꺼번에 사로잡았다. 그 사람이 등을 돌리면 돌릴수록 나의 고통은 점점 커져만다.


카페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카페에서는 피아노 선율이 인상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코드가 마음을 울린다는 것을 난생처음 알았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음악은 ‘슬픈 로라’였다.


카페 문 앞 공중전화로 하루에 딱 한 번 전화를 걸었다. 꼬박 3일 만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사촌 언니였다. 그날도 해가 서쪽으로 질 시각이었다. 오늘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가난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사촌 언니는 표정 없는 얼굴도 또박또박 내게 말했다. 동네 미술학원에 놓여 있었을 석고상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표정 없는 얼굴은 거만하다. 무표정을 통해 나는 깨닫는다. 내가 인격적으로 매장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사촌 언니는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대신 내게 찢긴 손수건을 탁자 위에 던졌다. 눈치 없는 나도 안다. 그 손수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


‘아, 찢긴 손수건.’


그녀와 함께 금정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범어사로 내려오는 길은 돌투성이이다. 어제 내가 다리를 다쳤듯이, 그녀도 하산길에 무릎을 다쳤다. 나는 손수건을 찢어서 그녀의 상처를 감쌌다. 그 손수건을 돌려준 것이다. 사촌 언니는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고 떠났다. 돌아서면서 ‘가난하면…’을 또다시 내뱉었다.


‘차라리 악담을 퍼부었으면….’


순간적으로 나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차라리 사촌 언니의 입을 빌려 그 사람이 저주를 퍼부어 주기를 원한 것이다. 저주는 그 어떤 것도 소멸시키는 힘이 있다. 저주의 영향으로 ‘나와 그 사람’, 즉 우리들의 관계를 한꺼번에 파묻어버리고 싶었다. 가난한 남자와 얽힌 스토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뻔한 통속으로 읽혀지기를 진정으로 원치 않았다.


사실 나는 그 사람의 정체를 몰랐었다. 나는 알 필요가 없었다. 내가 만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였지,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배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가난한 자의 허세라고 몰아붙였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통속적인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가난한 자의 비통속(非通俗)은 그 어떠한 것도 거짓으로 읽힌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촌 언니의 무표정에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그것은 간신히 연결됐던 한 가닥 남은 마지막 인연의 끈을 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나는 한겨울밤 폭풍이 몰아치는 날, 불빛이 하나도 없는 허허벌판을 헤매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그리고 밖은 너무 추웠다.

나는 손길을 원했다. 잠깐만이라도 내 손을 잡아줄 따뜻한 손길을 원했다. 배려는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삶에 지친 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배려는 또한 따뜻한 시선이다. 타인이 아닌 우리의 따뜻한 시선이다. 내가 절실하게 원했던 것은 잠깐이라도 그 사람의 따뜻한 시선과 손길이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운명은 그것조차 내게 허용하지 않았다.

 

사촌 언니가 떠난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이 어둠을 드리우고 밖이 깜깜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 허허벌판에 혼자 놓인 것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좌절할 틈도 없이 입대날이 다가왔다. 입대 전날 나는 주머니를 몽땅 털어 술을 사 들고 창녀촌의 여인숙을 애써 찾았다. 예전에는 창녀촌의 여인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저렴한 숙박시설이었다. 입대 전날 가난한 자가 자축할 곳은 이곳처럼 적합한 곳은 없었다.

포주가 찢긴 창호지 문을 간혹 두드렸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포주는 ‘빌어먹을’을 연발했다.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창녀 하나 품을 돈도 없는 놈이 들어 온 것이다. 사회에서 인정하고 있지 않는 포주에게조차 굴욕을 당해도 나는 한마디 말할 수 없었다. 논산행 새벽 기차가 떠날 때까지 홀로 술을 마셨다. 외롭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새벽녘에 여인숙을 떠났다. 100원짜리 동전 네 개를 방문 안에 던져 놓고 나왔다. 그 400원은 사촌 언니의 말대로 ‘가난한 자’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30여 개월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군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는 유독 힘든 군 생활이었지만 한 마디 신음조차 지르지 않았다.

군대 첫날부터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사촌 언니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바위처럼 굳어진 얼굴이었다.

굳어진 얼굴은 그것은 ‘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 그런 척’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떠한 험악한 상황에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통곡할 것 같으면 이를 앙다물고 바로 뒤돌아섰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굴욕으로 인해 무너지려는 존재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안간힘이었다.

그렇다고 사회를 원망하지 않았다. 니체가 제시한 강자에 대한 약자의 반감인 ‘르상티망’이 결코 아니다. 사회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왜곡하지도 않았고, 가진 자에 대한 원망을 의도한 적은 명백히 단 한 번도 없다. 인생 후반기에 나 같은 사람에게 흔히 나타난다는 극단적인 심리변화, 즉 지금까지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에난티오드로미아’ 현상도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을 속으로, 속으로 삭일 따름이었다. 그것은 정말 지난한 시간이었다.


부탁해야 할 때 부탁하지 않았다. 부탁은 애걸이 되고 애걸은 굴욕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아파할 때 아파하지 않았다. 엄살을 떠는 것으로 여겨진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았다. 분노는 못된 자의 혐오스러운 감정이다.울어야 할 때 울지 않았다. 울음은 나약함의 표시이다. 웃어야 할 때 웃지 않았다. 웃음은 가식이 된다.


나는 모든 것을 마음속의 깊고 조그만 방에 가둬놓았다. 내 삶 역시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곳은 창문 없는 작은 방이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쯔는 이것을 ‘모나드’라고 불렀다. 창문조차 없는 모나드는 외부와 소통할 수가 없다. 통로를 스스로 막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수십 여 년 전의 ‘시간과 ‘달맞이고개 카페라는 ‘공간’이 바로 ‘모나드’이다. 나는 꼼짝없이 특정한 시공간에 갇힌 것이다. 그 시공간은 내 젊은 날, 회색빛 일색인 슬픈 자화상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슬픔의 원천은 모나드에 머무른 세월의 크기만큼이라는 것을 진작에 깨닫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삶이라는 영역이 있다. 그런데 나는 내 영역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술 취한 사람처럼 길을 헤매면서 살아왔다는 것에 절망한다.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프랑스 작가 사강은 소설 ‘슬픔이여 안녕’에서 슬픔을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강은 또 슬픔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슬픔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가 보다.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표현하면서 즐길 수 있는가 보다. 나도 내 슬픔을 아름답다고 얘기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삶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과정에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결론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까지 어두운 밤으로의 여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밝아오는 새벽으로의 여정을 꾸려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의 여정은 특별한 여정이 될 것이다. 내면으로의 새로운 여정이다.


그렇다면 먼저 나는 나만의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문이 없다면 창문을 만들고, 문이 없다면 문을 만들어야 한다.  방을 나가기 전 이제는 얘기하자. 그렇지 않으면 이 작은 방에서 나갈 수 없다. 수십 년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둔 이야기를 끄집어 내야만 한다. 그것은 존재의 비참하고도 이중적인 나의 이야기이다.


그해 겨울, 수온 주가 곤두박질치던 날이었다. 바람도 무척 매서웠다. 열린 옷 사이로 바람이 훅훅 들어올 때마다 비명을 지르곤 했다. 나는 당시 서울 변두리 천호동의 먼 친척 집에서 며칠째 기거하고 있었다. 단칸방에 4명의 식구가 비좁게 살았는데 내가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어려운 살림살이라서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려 했던 기억이 난다.


한밤중에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단칸방이지만 따뜻한 방에 몸을 녹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희미한 비명이 들린다. 귀를 기울였다.


“여보세요.”


불 꺼진 과일가게의 판매대 천막에서 나오는 희미한 소리였다. 여인네의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아마도 노숙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내가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는 애써 그 소리를 외면하고, 소리 나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프고 슬프다. 나는 그 가난한 여인을 외면했고, 나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


수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인네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 죽어가는 희미한 소리가 아닌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처럼 굉음으로 들린다. 날이 궂은 날에는 가끔 얼굴도 모르는 여인네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그런 날이면 나는 미친 듯이 술을 마신다. 여인네의 ‘여보세요’라는 비명에 귀를 막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안다. 그 여인네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안다. 꿈속에서 매번 걸리지 않는 전화기를 돌리는 이유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상처를 입은 똑방식으로 나는 그 힘없는 여인네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가난한 자가 고통과 굴욕을 당하지 않는 세상을 꿈꿔 왔던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기억이다. 나는 조그만 배려를 원하는 가난한 자의 시선을 외면했다. 따뜻한 손길만 내밀었으면 될 것을….


삶의 큰 영역은 배려이다. 배려의 손길만큼 삶의 영역도 커진다. 가난한 자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은 자신의 삶과 사회를 널리 확장하는 것이다.


‘어째서 인간은 다른 누군가의 위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며, 심지어 자기 안전도 고려하지 않은 채 타인을 구출하려 움직이려 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나는 당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가 운다. 조그만 방에서 흐느껴 운다. 누군가 들을세라 숨죽여 운다.


아이야, 슬프다는 것은 우는 것이다. 소리 내 우는 것이다. 꽁꽁 가슴 깊이 감춰두지 말고 펑펑 우는 것이다. 조그만 방에서 숨죽여 울지 말고 세상이 떠들썩하게 우는 것이다.


너는 탁월한 선택을 내렸다. 너에게 굴욕을 주려는 자들에게 선택권을 결코 주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그들의 결정을 뒤집는 선택을 한 것은 너의 탁월한 결정이다. 살다 보면 정말로 중요한 결정을 할 순간이 온다. 그런 상황에서 너는 존엄성을 선택하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

 

존엄성을 지키려는 탁월한 결정에는 슬픔이 따를 수 있다. 존엄성 있는 생활방식은 완벽하지도 않고, 때로는 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게 소리 내어 올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너를 굴복시키려는 자들의 눈을 온 힘으로 응시하라. 그것으로 모든게 정리된다. 그게 바로 너의 당당한 존엄성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독림성의 상실과 무능을 말해준다. 또한, 언제라도 굴욕을 당할 위험에 처해 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도 존엄이 있고 배려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신의 명령과 다름아니다.


내 사진에는 얼굴이 없다. 스스로 얼굴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갈무리해도 슬픔이 고여 있는 얼굴을 찍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얼굴을 찍을 것이다.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

세네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이제 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두 쌍의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바다가 쪽으로 내려간다. 여전히 나는 달맞이고개의 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제 해는 거의 바다와 맞닿아 있다. 황혼 무렵의 바다와 하늘은 언제나 단조롭다. 갑자기 피아노곡인 ‘슬픈 로라’가 들린다. 트럼펫으로 기교 부린 것이 아니라 오직 피아노로만 단조롭게 연주하는 ‘슬픈 로라’가 들려 온다. 예전에 카페에서 그 누군가를 기다릴 때 듣던 음악이다.


나는 카페 문 앞의 공중전화기에서 다가간다. 거침없이 전화번호를 모두 다 돌린다.


“여보세요….”

이전 04화 방랑의 여정 ㅡ사마르칸트에서 만난 여인의 '따뜻한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