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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Mar 22. 2022

방랑의 여정 ㅡ사마르칸트에서 만난 여인의 '따뜻한슬픔'



그녀는 창녀였다.

지금은 창녀가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쉽게 영성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 극히 일부지만 고통 속에서 영적인 여정을 걷는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숙소인 사마르칸트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호텔 근처에서 가이드와 술을 마시기로 했다. 호텔 앞 가로등 밑에서 그녀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조금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소리죽이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있었다. 곧바로 내리비추는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눈물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가로등의 노란빛 불빛에 노출된 눈물 흘리는 여자의 얼굴을.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보다는 따뜻함을 느꼈다. ‘따뜻한 슬픔’이라니, 나의 마음은 급격히 요동쳤다. 슬픔과 따뜻함, 동시에 상반된 감정을 일으키는 이런 얼굴을 결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묘한 감정이었다.


그녀는 가이드가 아는 여자였다. 원래 오늘 같이 만나기로 한 것인데, 내가 끼어든 모양새가 되었다. 가이드가 말했다.


“오늘 밤 사마르칸트에서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은 이 여자 때문입니다.  여자의 삶을 알고 보면 호기심을 느낄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호기심을 뛰어넘는 커다란 관심이었다.  


여하튼 우리는 카페에 들어섰다. 우즈벡 대중주인 보드카를 주문했다. 우즈벡 사람답게 그녀는 도수 높은 보드카를 훌쩍훌쩍 마셨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자 나는 그녀에게 아까 왜 울었냐고 물었다. 여기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잠시 멈춰야겠다. 그리고 오늘 아침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2022년 1월 1일 10시 반.

사마르칸트 역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이날 오전 8시 기차로 2시간여 거리인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왔다.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기차를 탄 것이다. 술에 취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전날 보드카를 진탕 마시다가 불쑥 사마르칸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 나리 개나리… ’ 노랫가락이 갑자기 들린 탓이다. 환청이라면 환청일 수 있다. 슬프면서도 여운이 길게 남아있던 노랫가락이 나를 들뜨게 한 것이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기억하자면 나는 10여 전에도 사마르칸트에 왔었다. 10여 명인 우리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는 고려인이었다. 한국말이 다소 어색한 가이드는 버스 이동 중에 나리나리로 시작되는 ’봄나들이‘ 동요를 불렀다. 친할머니가 술만 마시면 부른다는 노래였다. 구소련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된 할머니의 설움을 굳이 상기할 필요는 없었다. 가이드 노래 자체가 설움 덩어리였기 때문이었다. 버스 안의 일행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이드는 분명 30대 남자인데, 들리는 것은 주름 잔뜩 낀 얼굴, 그만큼 가슴앓이 세월을 보낸 할머니가 구슬프게 흐느적거리는 노랫가락이었기 때문이다. 익히 아는 노래였지만 가이드가 부르는 노랫가락은 너무도 서글펐다.


우리 일행의 마음은 급격히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가이드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짧은 일정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마음은 요동을 쳤다. 마음이 심하게 뛰는 이유를 첫날에는 잘 몰랐다. 그러나 사마르칸트를 떠날 때가 되어서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마르칸트는 분명 나의 운명과 엮어져 있고, 그 운명의 실타래를 찾기 위해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직감일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5000km가 훨씬 넘는 먼 거리이기도 하고, 더구나 내가 아는 사람이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마르칸트는커녕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것도 당시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나하고는 현실의 연이 없었던 곳이다. 그런데도 운명이라니.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운명이라는 끈이 있다면 나는 이곳을 다시 방문할 것이다. 10년 이내에….‘


지난 연말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전 세계에 범람하는 것도 문제였고, 국내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했지만 나는 타슈켄트행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우즈벡을 가야만 한다는 내면의 소리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이다. 사실 우즈벡에서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음을 지금에서야 고백한다.


사마르칸트 첫 방문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사마르칸트에 왔다. 그것도 계획해서 온 것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방문을 한 것이다. 나는 10년이라는 기한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온 것에 만족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로마 장군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원로원에 보낸 승전보는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여기에 왔다.


‘그래도 왔지 않는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대 동서양의 연결로인 실크로드의 핵심도시인 사마르칸트는 누구나 아는 도시이다. 하지만 내가 사마르칸트에 온 것은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이자 여행의 시작점인 레기스탄 광장, 고구려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는 아프라시압 박물관 등 고대 유적지를 보러 온 것은 아니다.


사마르칸트에서 무엇을 특별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역 앞에서 서성거렸다. 나는 손님들을 끌어들이려는 택시기사들을 무끄러미 바라보았다. 택시기사들은 필사적이었다, 외국인으로 보이면 어김없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코로나로 인한 해외 관광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외국인은 택시기사들의 좋은 호객 대상인 것이다. 나에게도 여러 명의 택시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허나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들은 곧 물러났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우울한 회색빛이다, 우산을 쓸만한 비는 아니었다, 비를 맞으면서 사마르칸트 시내를 걷기로 했다. 나는 한국인 특유의 등산 가방을 맨 채 택시기사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택시기사는 대부분 우즈벡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동아시아계 얼굴을 가진 택시기사였다. 길을 걷다가 돌아섰다. 그가 누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에나, 알렉….”


예전의 가이드였다. 얼굴은 세월을 비껴가지 못하나 보다. 얼굴 윤곽은 그대로이지만 10여 년 사이에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사실 여기 오면서 예전의 가이드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10여 년의 세월의 간극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더구나 그와의 인연은 겨우 2박 3일간의 일정뿐이라는 점이 맘에 걸렸다. 그래서 만나더라도 그의 얼굴을 기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단박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운명의 끈이 나를 사마르칸트에서 강력하게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런데 나는 그 운명의 끈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그날 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에게 예전처럼 가이드를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오늘 밤늦게라도 타슈켄트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자, ‘오늘 밤은 자신과 술을 마시고 내일 타슈켄트로 돌아가는게 어떠나’고 알렉이 제안했다. 사실 나도 당일 타슈켄트로 돌아가는 것이 마뜩치않아서 그의 제안을 곧바로 승낙했다.


운명은 아마 내가 어젯밤 술을 마실 때부터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 슬픈 노랫가락이 갑자기 떠올랐고, 충동적으로 사마르칸트행 기차표를 예매한 것은 운명의 수순 이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 바쁜 연말임에도 불구, 타슈켄트행 비행기를 탄 것 자체가 운명의 시그날 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그녀를 만나기 전 상황이다.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왜 울고 있었어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그에 대한 말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얘기로 그녀의 눈물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한 얘기를 그대로 적어본다. 나중에 이것을 하나씩 풀어쓸 생각이지만 지금은 드라이하게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인도 흑마술사였어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도 그 남자는 아버지 몰래 가끔 제 몸을 만졌지요. 저는 그것을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요. 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 몰랐기 때문이지요.”


16.17살 소녀 때 그녀는 성추행을 당했다. 그것도 아버지의 동료에게 당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남자는 그녀를 덮쳤다. 어린 나이인 그녀는 겁에 질려서 그 남자가 하는 대로 나 둘 수밖에 없었다.


인도 흑마술사는 그녀를 섹스의 화신으로 조련했다. 보수적인 우즈벡 사람들로서는 기겁할 펠라치오도, 그룹섹스도 가르쳤다. 그녀는 그것을 남녀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성에 무지한 탓이다.


19살이 되었다. 우즈벡 사람들은 일찍 결혼한다, 우즈벡 무슬림들은 결혼 전까지는 처녀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커다란 곤욕이 뒤따른다. 그녀의 사정을 모르는 어머니가 결혼을 추진했다. 우즈벡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수백 평의 터키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갑부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생활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야만 했다. 첫날밤부터 섹스 기교를 부린 그녀를 전 남편은 학대했다.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매일 때렸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 가족을 통솔하는 큰오빠가 남녀 간의 교제에 엄격한 전통적인 무슬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술집을 나갔다. 처음에는 몸을 팔지 않았다. 그러나 곧 몸을 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누웠기 때문이다. 외모가 뛰어난 그녀의 몸을 찾는 외국인 고객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 말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그녀가 유명한 국제창녀가 된 것이라는 말이다. 수십 명을 거느린 레스토랑 안주인에서 하루아침에 국제창녀로의 변신은 그녀를 좌절시켰다.


어느 날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여러 가지 성병에 걸린 것이다. 또한, 술로 보낸 그녀의 몸은 예전의 날씬함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섹스와 술 그리고 마약에 의지하면서 그녀는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이제는 사는게 아니라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자신을 추수릴 수 없었다. 그녀에게 구원이 절실했다. 그러나 구원의 빛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영화의 장면같이 한 외국 남자가 나타났다. 예전에 술집에서 만난 남자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녀의 고통은 그 남자 때문에 더욱 심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우즈벡으로 돌아와 그녀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 남자는 그녀의 고향인 사마르칸트로 그녀를 보냈다. 그리고는 최고의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녀는 6개월 만에 완벽히 변신했다. 예전의 날씬한 모습을 되찾았다. 마음도 평온해졌다. 그 반년이라는 세월은 거룩한 시간이었다. 고통스럽게 지루한 그 긴 시간을 혼자만의 기도로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완벽하게 탈바꿈됐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의 힘’이라고 하지 않고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실 사랑과 은혜의 차이를 잘 모른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이기에 그대로 적을 뿐이다. 번득이는 삶에 대한 통찰, 갑자기 찾아오는 깨달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은혜는 이성의 차원이 아니다. 그 너머의 영성 차원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이다.


영성이란 생명력이다. 우리를 온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영성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 짙어진다.  삶에 지친 우리가 영적 여정을 걷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내게는 한줄기 풍요로운 은혜 같은 빛이었지요.”


그녀의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드라마 각본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를 듣는 나의 마음은 공복에 매운 생마늘을 꾸겨 넣은 것처럼 아렸다. 눈물이 얼굴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오히려 되물었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내가 물었던 질문이다.


“왜 우세요. 내 얘기가 슬퍼요?”


나는 왜 우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삶이 내게 그대로 감정이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감정이입에 의한 그녀와의 동일화가 나도 모르게 이뤄진 것이다.


아직도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여린 그녀가 겪은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삶의 얘기를 개략적으로 풀었다. 그러나 앞으로 풀어야 할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야기를 푸는 것은 바로 나의 업보이며, 내가 사마르칸트에 보내졌을 때부터 예정되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삶이 전체적으로 깨어진 너머의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보다 더 깊은 내적인 고통에서 끌어올린 그녀의 영혼의 처절함을 어떤 식으로 풀어낸다는 말인가? 특히 언젠가는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흑마술사의 페이스북을 추적하던 그녀의 분노는 어떻게 버렸을까? 그것은 그녀의 영적 여정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영적 여정은 삶의 집착으로부터 방향을 급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날 타슈켄트로 돌아왔다. 그녀와의 인연이 사마르칸트에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첫 만남에서 가로등 불빛에 비친 눈물 어린 얼굴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각인된 얼굴은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1월 중순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그녀를 두 번 더 만났다. 한번은 우리가 자주 찾는 ‘한강’ 이라는 한국식당에서였다. 긴 머리는 여전했고, 하얀 티와 청바지를 입은 채 수수한 옷차림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달라진 것은 핸드백 대신 여행용 트렁크였다. 연주곡 ‘가방을 든 여인’의 간결한 색소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방 하나만 들고 훨훨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이 겹쳐 보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묵례를 했다.


“타슈켄트에 살러 왔어요.”


우리는 간단히 인사만 하고 각자 식사를 했다. 서로 일행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번은 내가 묶고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 옆에는 외국인 남자가 있었다, 그녀에게 ‘은혜의 선물’을 안겨준 남자로 보였다. 나는 그 남자를 알 것만 같았다, 한번 어디선가 간단히 인사를 한 적이 있던 남자였다.


그녀와의 더 이상의 접촉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녀를 다시 만날 것을 예감한다.


그녀를 이해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가난하다. 그럼에도 불구, 그녀는 동물 사랑이 지극하다, 길거리 교통사고로 고통받는 고양이를 수의사에 데려간다. 다리가 짓이겨진 고양이를 안고 그녀는 펑펑 운다. 아무 연고 없는 고양이 치료비로 우리 돈으로 100만 원이 넘는 돈을 서슴지 않고 지불 한다, 100만 원은 우즈벡 월급장이로서는 부담하기 힘든 몇 달치 월급이었다.


그녀는 나쁜 일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분별한 섹스와 마약을 정리했다. 그것은 나쁜 일이기 때문이다.


‘나쁜 일을 하면 동물이 죽는다’라고 굳게 믿는다. 다리 저는 고양이가 또다시 죽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의지할 바 없는 가여운 동물을 사랑하는 자는 모두 착하다. 나는 그녀를 진정으로 착한 자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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