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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Apr 24. 2022

방랑의 여정 –안개 속의 '복수의 묵시록'

ㅡ우즈벡 여배우 이야기


“복수지요!”


’복수‘라니. 그런데 대상이 친아버지라니…. 나는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용어이다. ‘잘 못 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것은 정말 많은 것을 얘기해 주는 표정, 보다 더 한 얘기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무엇인가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눈을 껌벅거리며 다시 보았지만, 그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복수는 신성함, 그 자체이다. 복수는 신의 영역에 속한다. 신 중에서도 복수의 신이 가장 힘이 세다. 그리스에는 두 명의 복수의 여신이 있다. 그 중 강력한 복수의 여신은 일반적 의미의 복수를 수행하는 ’에레니스‘가 아니라 또 다른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이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욕망 오만 무절제의 불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다. 네메시스는 이러한 인간들을 심판하는 판관이고, 인간은 모두 이러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다. 나 역시 네메시스의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타슈켄트는 12, 1월에도 그리 춥지 않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며칠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날은 몹시 추웠다. 하늘에 떠 있는 달도 싸늘해 보였다. 달은 사람의 감정을 민감하게 고조시키는 묘한 힘을 감고 있다. 미치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지난해 연말 타슈켄트에 도착하자마자 초청자인 사업가가 나를 재촉했다.


‘이렇게 추운 날 어디를 가자는  것인지.’ 구시렁거리면서 따라나섰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은 알았지만 어디를, 그리고 왜 가는지는 몰랐다.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무작정 따라나섰다. 도착해서야 선물이라도 준비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미리 얘기라도 해주었다면 빨간색 스웨터를 준비했을 텐데요?”


나는 다소 원망스러운 어투로 사업가에게 말했다. 축하하는 자리에 빈손으로 들어가기에 멋쩍었다. 그 날은 무명배우에서 이제는 우즈베키스탄의 스타가 된 여배우의 집들이 날이었다. 방 한 칸 임대료조차 제대로 지불 하지 못해 항상 전전긍긍하던 여배우가 난생처음 갖게 된 집이었다.



일가친척들이 다들 모였다. 우리는 특별손님으로 초대되었다 . 2층 구조에 방이 8개나 되는 상당히 규모가 큰 집이었다. 집 구경시켜주겠다는 그녀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2 층 방은 그녀의 아들들이 머무는 방이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그녀였다.


그녀는 자식들의  방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녀는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여러 해 동안 나는 그녀가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 번도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안다. 그녀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의 눈물을 얘기하는 데는 몇 년 전의 일을 먼저 끄집어내야 한다. 나는 당시 그녀가 배우인 줄 몰랐었다. 내가 그녀의 직업에 대해 오해할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배우와 관계없는 일을, 그것도 여러 가지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행사의 주최자인 그녀가 피곤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새벽녘에 기어코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느냐’는 질문에 ‘촬영’이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그때도 모델로서의 촬영일 줄 몰랐다. 나중에 그녀는 그날 촬영한 영상을 보내왔다.


“정말 이것을 하루 만에 이것을 다 찍었어요? 그것도 겨우 100달러 받고?”


돈을 아끼려 주어진 24시간 이내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촬영한 것이다. 촬영자도 모델도 녹초가 될 만한 엄청난 분량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배우로 각인한 첫 번째 장면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매우 이상한 첫 기억이다.


그리고 내게 각인된 그녀의 이미지는 ‘매우 가난한 여배우’였다. 그리고 ‘웃지 않는 여배우’였다 ….




그녀는 돈에 굶주렸다. 돈 버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배우 모델을 비롯한 여행 가이드, 운전기사, 심부름꾼, 통역, 음식 서빙, 행사기획과 진행 등 다양한 일을 소화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보니 그녀를 막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나보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내게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장난감이 아니에요. 장난감 취급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우리 일행 중 누군가 그녀를 하대 취급한 모양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참담함을 느꼈다. 돈의 포로가 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자존심을 놓지 않으려는 그녀의 아픔이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뜬금없이 말했다.


“나는 일본에 갈 것입니다. 공장에서 일할 거예요."


친구가 일본의 화장품 공장에서 일하는데 돈을 많이 번단다. 그래서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만류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얘기는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참견’이라는 주제넘은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부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2년 동안 나는 타슈켄트를 방문하지 못했다. 그녀를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난 2년간에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두 가지 크나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그녀가 무명배우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알아주는 인기배우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항상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울고 웃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 변화를 얘기하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도중 계단에서 눈물을 보인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복수’라는 단 한 단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꿀꺽‘  그녀의 목젖이 꿈틀거렸다. 말을 이어가려 하는 데 침이 넘어가는가 보다. 그녀는 한 번 심호흡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물이 저렇게 맑을 수 있구나.‘


눈물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면서 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 나를 집어넣지 않으려는 나름대로 완충방안이다. 나는 아직도 이런 어색한 장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힘들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여린 사람이다. 배신에 고통스러워서 마취제로 자신을 마비시키면서도 복수를 감히 꿈꾸지 못하는….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목이 메서인지 띄엄띄엄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나와 어머니를 쓰레기장에 버렸지요. 그때도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이었지요. 단지 젊은 여자와 살려고 우리 모녀를 이 쓰레기장에 버렸지요.”


그러니까, 오늘 집들이 장소가 바로 쓰레기장이라는 말이다. 그녀는 지금도 살고 있는 이웃집, 즉 아버지 집보다 더 큰 집을 짓고,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쓰레기장의 모녀가 겪을 세상살이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으니, 한마디로 정리하자.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말로 응축하자.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더 이상 길게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를 찾는 친척들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 그날 한꺼번에 그 모든 과정을 듣는 것은 피차간에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 밤거리에는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안개는 길가의 가로등 불을 밑에서부터 서서히 감싸고 있었다. 나는 늪 속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 잘못 빠져들어 가서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정글 속의 늪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국땅, 타슈켄트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 며칠 동안 나는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귀국하기 전에 꼭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복수의 결말을 듣는 것이었다. 복수 과정 또한 강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아니라 그녀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밤샘촬영이 예사인 ‘톱스타’이지 않는가?그런데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 왔다.


그날 나는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몸이 안 좋아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객실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누군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빨간 스웨터에 하얀 털모자를 쓴 그녀였다.

그녀가 숙소인 호텔을 방문한 것이다. 바쁜 촬영 와중에 몸이 안 좋은 우리 일행을 돌보러 왔다. 약과 주사제를 가지고 찾아왔다. 누구를 시켜도 될 일이지만 그녀는 직접 방문했다. 예전에 도움을 준 한국인에게 의리를 지킨 것이다.


사실 이것은 보통 의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코로나 치료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의료체계가 선진국인 한국이 아닌 우즈벡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호텔을 다녀오고 나서 코로나에 걸렸다고 한다.



그날 호텔 라운지에서 그녀는 내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여주었다. 논리를 뛰어넘은 초월적인 이야기가 뒤섞인 내용이었다. 세상에는 우리가 비상식적이라고  믿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항상 쓰레기장이 떠올랐어요. 쓰레기장에서 헌 옷가지 꾸러미를 껴안고 울고 있는 어머니와 그 옆에서 불끈 주먹을 쥔 어린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지요.”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외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반드시 돈을 크게 벌 거라고 외치는 소녀의 모습을 …. ”


“그런데 웃기지 않아요. 어린 꼬마가 뭘 안다고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는지….”


자신과 어머니에게 폭력을 수시로 휘두르는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친아버지 아닌가? 친아버지에게 하루아침에 버려졌다. 따뜻한 방에서 자다가 졸지에 차디찬 쓰레기장으로 버려진 것이다. 분하고 억울했다. 꿈틀거리는 그 무엇인가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녀는 어머니를 부여안코 결코 울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이후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 웃음을 날리지만, 그것은 삶의 도구일 뿐이었다.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분노와 다짐으로만 세상살이가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의 다짐이 무색해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녀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절망'이라는 상처를 깊이 심어준 것이다. 그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앙칼진 목소리가 그녀의 내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던 날,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신이 찾아와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았다. 그곳은 사막이었다. 태고의 정적만이 숨 쉬는 곳에 신들이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래 사막으로 가자.’


그녀는 만사를 제쳐놓고 한밤중에 사막을 찾았다. 사막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생사를 건 기도를 올렸다. 하늘의 신, ‘탱그리’를 간절히 찾았다. 아침 해가 떠올랐다. 밤새 기도를 올린 것이다. 아침이라도 사막은 섭씨 50도를 넘는다. 그래도 그녀는 사막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질 때까지 기도를 드렸다.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그녀는 하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때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어요. 네가 넘어진 그 땅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복수하라. 처절히 복수하라….”


한순간 강한 충격이 그녀를 때렸다. 하나의 영상이 뚜렷하게 보였다. 여신이 땅바닥에 늘어져 있는 그녀를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여신의 정체가 복수의 여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복수의 여신이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타슈켄트로 돌아왔다.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은 일말의 가치도 없어 보였다. 그동안의 관계는 너무 빈약하고, 모두 무의미해 보였다. 이제는 힘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이고, 힘이 되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모든 것을 거부했다.


복수는 모든 것의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념 관념 관습 비도덕 도덕 신념 위에 복수가 있다. 복수가 이런 것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복수는 그녀의 삶 자체이었다. 복수만이 그녀의 친구였다.  또한, 좋고 나쁘고의 판단은 버렸다. 그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었다. 낡은 관습도 상식도 버렸다. 그것은 나약하고 평범한 자들의 도덕률이다. 힘이 없는 '작은 가르침'의 희생자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초인(위버멘시,uebermensch)의 면모가 그녀에게서 묻어난다. 힘에의 의지(WILL OF POWER)를 추구하는 초인처럼 그녀는 오직 힘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여자 감독을 만났다. 여감독은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여자였다. 그녀는 여감독을 성공의 기회로 보았다. 여감독도 그녀를 기회로 여겼다. 기회는 시간을 오래 주지 않는다. 날아가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 인연임을 알아차린 두 여자는 즉각 의기투합했다. 그녀가 여감독에게 들려준 두 번째 결혼 스토리는 극적이었다.


그녀는 두 번 결혼 하고 두 번 이혼했다. 두 번째 결혼이 한국인과의 결혼이었다. 그녀가 한국인과의 결혼한 것은 그 한 맺힌 돈 때문이었다. 그게 발각이 돼서 3개월 만에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여감독은 그녀의 결혼 스토리를 드라마로 각색했다. 이 드라마는 우여곡절 끝에 TV에 방영됐다. 그녀의 한 맺힌 연기는 우즈벡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우즈벡인들은 그녀의 스토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 드라마로 그녀는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다. 단역배우를 전전하다가 주연으로 출연한 단 한 편의 드라마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그녀는 일약 스타가 된 것이다.


그녀는 국민이 사랑하는 여배우이다. 내가 그녀와 로비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지나가는 손님과 종업원이 수시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같이 커피를 마시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적막한 사막에서의 죽음을 놓고 한 기도는 그녀의 내면에 강력한 불꽃을 일으켰다. 변형을 일으키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탱그리’의 계시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넘어진 그 땅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일어나서 복수하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무너진 그 땅에서 일어나라’는 계시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나의 실패한 결혼은 바로 내가 엎어진 땅이고, 그 땅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지요. 전 나를 무너뜨린 바로 그 땅의 이야기로 인기배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통해 나는 일어섰지요. 그들은 바로 내가 쓰러진 땅이고, 나는 그 쓰러진 땅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잠깐 스타 탄생 전의 일로써 부연 설명할 것이 있다. 드라마를 찍기 전의 일이다. 감독에게는 드라마 찍을 카메라도 없었다. TV에 방영하기 위한 돈도 없었다(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우즈벡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는 그녀의 피눈물 나는 간청과 읍소가 있었다는 것으로 정리하자.  


“투자에 대한 수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 도움이 없었다면 드라마는 완성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 이전에 저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겠지요.”


그녀는 그 도움을 무척 고마워했다. 그 도움은 세상에 대해서 분노에 차 있던 그녀를 사랑스러운 인간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제 웃고 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도움을 준 인연을 나도 알고 있다. 성공 못 할 수도 있는,더욱이 한 푼의 투자금도 건지지 못할 수도 있는 베팅이었다. 단역배우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여감독에게 베팅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녀는 사막에서 만난 복수의 여신이 자신을 도왔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녀를 통해 복수는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수를 꿈꾼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복수는 파라다이스이기도 하다. 복수는 삶을 이끄는 힘의 원동력인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길고 길지만 여기서 마쳐야겠다.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모호한 장면을 얘기해야겠다. 아직도 내가 정확히 본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모호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타슈켄트 외곽에 ’차르박‘이라는 호수가 있다. 산허리에 자리한 호수였다. 그곳에서 1박 2일 기념행사를 치른 날이었다. 전날 행사로 피곤해서 모두 잠이 깊게 든 날이었다. 나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녘에 일어났다. 물을 마시려고 외부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 2층에서 내려왔다. 산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안개 낀 밤의 데이트’ 기타 선율과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음악을 자연스레 떠올리면서 몽롱한 상태에서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그런데 누군가 정원에 있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상념에 젖어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미동 하나 없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녀는 그때에도 탱그리의 계시를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나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위기의식의 정체를 최근에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탱그리 때문이었다. 탱그리의 계시는 나의 운명과도 단단히 얽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도 그녀가 기도했던 사막을 두 번 다녀온 적이 있다. 우즈베키스탄 자치공화국인 ‘카잘크파크스탄’의 수도 ’누쿠스’에서 ’아랄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사막이다. 사막 한가운데를 자동차로 이동하는 도중 일행은 모두 잠들었는데 나는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일정에 치인 나도 피곤할 만도 한데 누가 나를 깨고 있었다. 누구인가?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신의 목소리였을까?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그녀처럼 신의 계시를 듣지 못했다. 정적이 흐르는 사막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그 이유를 이제서야 알겠다. 계시는 모든 것을 던진 자에게만 들리는 것이다. 나와 달리 그녀는 탱그리의 세밀한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 어쩌면 나는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생에서는 나는 ’사막의 수도사‘였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번 생애에서도 방랑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신의 계시를 들을 때까지는 섣불리 길가에 집을 지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즈벡에 다녀온 지 4개월이 지나간다. 나는 이제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짜 논리 뒤에 숨어 지내지는 않는다. 힘없는 것에 의지하고 힘없는 곳에서 쉬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도덕과 비도덕 중의 하나만의 선택은 나에게 의미 없다. 그것은 나약한 자들의 왜곡된 논리이다. 산다는 것과 관련, 모든 것이 명확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내 삶에서 모호한 것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내게는 단 하나, 명확하지 않은 의문이 있다. 해답이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것은 안개 속의 ’복수의 묵시록‘이다. 복수는 심판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노래한 ’요한묵시록‘도 그에 앞서 악한 세력을 심판했다. 나는 누구를 심판하고,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의 복수의 묵시록에는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까? 죽은 자들의 세상일까, 아니면 산 자들의 향연일까?

그것은 탱그리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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