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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Oct 04. 2022

방랑의 여정 - 타인의 시간


나는 절망한다. 그래서 존재한다.

나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은 나를 속이는 것이다. 희망은 현재를 속였고, 그리고 미래와 과거도 속였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시간을 속일 수 없다.

무력감,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엄습하는 것은 무력감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온몸을 휘몰아치는 것이다. 허나 중압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나는 또다시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달에도 하노이에 왔었다. 코로나 이후 두 번째 해외 여행지로 하노이라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이곳을 선택했다. 내 마음속의 ‘또 다른 나’는 내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하노이로 가라.’

같은 곳을 반복해서 방문한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반복되는 시간이다. 시간의 반복은 감옥이다.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이다. 나는 감옥 안에서 하루하루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은 한가지로 채워진다. 그것은 밋밋한 시간이다. 나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열정이 부족한 타인의 시간으로 메꿔지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방향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의 나’는 외친다.


‘강렬히 살아라.’


이렇게 살 바야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열정적인 삶과 죽음을 선택지로 놓고  나는 정녕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노이는 뭔가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우연이 겹쳐져서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우연한 일이 중요한 것은 우연을 받아들이는 반응에 달려 있다. 민감한 반응의 깊이에 따라 축 처져 있는 과거의 시간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 또한 과거의 반복일 뿐인 미래의 시간의 행로를 확 바꿀 수 있다.

예전에는 나는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갔었다. 그러나 이번만큼만은 달랐다. 공항에서 한참 동안을 머뭇거렸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공항에 도착한 지 거의 2, 3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낭을 메고 일어서려는 몸이 휘청거렸다. 공항의 의자에 앉아 있는 두어 시간 동안 몸의 긴장이 풀린 탓이다.

홍 강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홍 강 다리 입구에 들어서자 갑자기 중국 춘추 시절 말기 월나라 장군 범려가 떠올랐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와신상담의 주인공으로서의 범려가 아니다. 누구는 한평생 단 한 번의 삶도 제대로 살기 어려운데, 그는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분야의 삶을 세 번이나 새롭게 산 사람이다. 월나라 장군, 제나라 재상, 송나라 상인으로 산사람이다.
 
홍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던 중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나는 차의 창문을 닫지 않았다. 비를 맞고 싶었다. 빗물이 얼굴을 때리는 것과 동시에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리듬이 울렸다. 조그맣게 들려오기 시작한 리듬이 온몸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하노이 여정을 기획한 이래 줄곧 들려오던 리듬이었다.


‘천일의 앤’의 OST다. 영국의 왕비에서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비운의 역사상의 인물, 앤 왕비의 절망을 떠올린 것일까? 눈물이 빗물과 섞여진 채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새벽녘에 홍 강의 배에 올라탄 범려의 뒷모습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앤 왕비의 삶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는 직감했다.


‘이번 여정은 만만치 않음을….’

지난번 하노이에 욌을 때도 나는 ‘밋밋한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노이 여정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나의 일정은 거의 비슷했다. 매일 아침에 ‘미딩’ 거리의 한 카페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카페에서 ‘아보카도 스무디’를 마시는 게 첫 일과이다. 서너 시간 카페에 앉아 있다가 무료함에 젖어 들 때면 나는 카페를 나선다.


어디를 가야 할지 딱히 정한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애써 털어버리고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낯선 도시의 인파와 소음, 오토바이 행렬에 몸을 맡기고 나는 도시 이곳저곳을 떠밀려 다녔다.


오후에는 버스터미널, 기차역, 공항을 찾아가기도 했다. 결국, 떠나지 못할 것을 잘 알면서도 그곳에서 서성거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국에는 맥없이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이런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부른다. 정말 이것은 난센스다. 사람들이 나한테 철저히 속은 것이다.
나는 그동안 줄곧 ‘조건 없는 자유’를 외쳤다. 자유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억압이 자유로 변할 수 있다’라는 프랑스의 지성 ‘시몬 베이유’의 말에서 자유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자유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소망과 조건과 의지이다. 먼저 자신이 진실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소망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소망을 가로막고있는 현실적인 제약을 파악해야 한다. 의지는 마지막이면서 절대적인 요소이다. 억압하는 현실을 벗어나는데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의지뿐이다. 소망을 실현하는 자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이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로부터 자유’를 외친다고 자유인이  되는게 아니다. 여기서 우연이나 요행을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해가 뜨면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반복의 시간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지 못하고 하루를 보낸다. 소망을 표명했다가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비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표류자이다. 자유인이 결코 아니다. 표류자는 자신을 옥죄이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표류자의 삶에서 절실히 부족한 것은 스스로 내리는 결정이다. 결정이라는 것을 필연을 가장한 우연에 맡겨놓는다.
표류자의 삶은 타인의 삶에 불과하다. 표류자의 시간은 타인의 시간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타인의 시간 속에 사는 자는 자신의 시간을 계속해서 놓친다.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다.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는 내 삶을  진실로 후회한다. 후회란 자신의 시간을 놓쳐버렸던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특히 자신의 시간을 결정짓는 사람들을 보면 내 삶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내 마음속 저쪽 끝에서 숨어 있던 무언가가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끝없는 열정, 넘치는 에너지가 그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이 주창한 생명의 연속적인 분출, 즉 ‘엘랑비탈’을 그에게서 감지하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만난 장 화백이 그런 사람이다. 70대 중반의 장 화백은 하노이에 정착한 지 20여 년이 넘는 노화가이다. 장 화백의 삶을 그림으로 굳이 평가하자면 속사로 그리는 ‘크로키’이다. 긴장이 흐르는 서양화도, 여백이 충분한 동양화도 아니다.


그는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항상 젊은 피 냄새가 난다. 열정이 넘친다는 말이다. 열정의 젊은 마음은 언제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열정은 에너지 진동 주파수가 높기에 창조적 힘과 공명할 수 있다.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은 열정뿐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이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에게는 한 가지 신비한 능력이 있다. 사람의 에너지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파동으로 그 사람의 에너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지난 8월 하노이를 방문 중일 때 장 화백이 내게 불쑥 던진 말이 귀국한 이후에도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하노이를 떠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오늘 누구를 만났어요? 갑자기 에너지가 증폭되었네요.”

나는 당시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나는 의미 없는 대답을 했다.


“그래요. 내게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봐요.”

그러자 장 화백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했다.

“당신과 똑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났군요. 당신이 만났던 사람은 당신 영혼의 분신입니다, 지구상에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은 수십 명이 될 것입니다. 그중 한 명이 여기 베트남에 있었던가 봅니다.”


오늘같이 강력한 에너지가 솟구칠 때는 분명 같은 주파수대의 누군가를 만났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장 화백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그날 누구를 만났는지 생각해보는 사이에 시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국내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서둘러 장 화백을 다시 만나야 했다. 삶을 미루는 것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린다고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 달 만에 재차 하노이를 찾은 것은 이 때문이다. 매일 가던 카페에서 아보카도를 마시던 중 장 화백이 불쑥 들어왔다. 장 화백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항상 그런 식이다.


나는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와 같은 영혼을 가진 분신을 만났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그날 분명히 당신의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났어요. 당신의 에너지가 그 전날보다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어요.  주파수 증푹이 일어난 것이지요.”

나는 그날 만났던 사람을 아무리 헤아려봐도 그럴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 화백은 말했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옆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파수가 증폭됩니다.”

나는 한 달 전의 그 날을 애써 기억해냈다. 나는 처음 간 베트남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남자 2명과 여자 2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40대 전후로 보이는 베트남 사람들이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일행 중 한 여자가 이야기하면서 종이로 장미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이학은 많이 보았지만, 종이 장미꽃을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종이 장미와 내 영혼을 엮는 것은 사실 무리이다. 그러나 나는 종이 장미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장 화백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지금에서 고백한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것은 종이 장미보다는 슬픈 눈망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방금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 웃으면서도 공허해 보이는 눈, 애써 아픔을 참아내는 듯한 눈, 슬픔을 갈무리하는 눈이 슬픈 눈망울이다. 나는 장 화백과 헤어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슬픈 눈망울과 영혼의 분신…,”

나는 확인해야 했다. 지구상에 나와 똑같은 영혼을 가진 수십 명이 있다니….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내 분신의 삶과 내 삶을 함께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슬픈 눈망울을 가진 나의 분신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사파로 가는 길, 창밖의 풍경은 낯설다. 삶은 방랑이다. 방랑이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곳으로 이어지는 방랑길이다.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나의 얼굴이 비친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망울을 가진 얼굴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이내 나의 얼굴로 변하고 만다. 나는 왜 홀로 사파로 가는 것일까?


3143m 높이의 판시판에 올랐다. 판시판은 사파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아니 베트남 모든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산이다, 정상에서 산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아래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애써 바라보았지만 정말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헤매다가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커피숍을 찾았다. 한잔의 커피가 그렇게 쓸 수가 없다. 그때 절묘하게도 ‘천일의 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산안개 속의 찻집에서 듣는 ‘천일의 앤’은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셨다. 감상에 젖어있던 나는 장 화백을 떠올렸다. 이제는 정말 장 화백의 얘기를 해야겠다.

내가 슬픈 눈망울을 얘기하자 장 화백은 엉뚱하게도 사파를 끄집어냈다.


“사파에는 영혼이 사는 고향이 있습니다.”


“당신도 슬픈 눈망울을 갖고 있지요. 당신의 슬픈 눈망울이 영혼의 에너지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곳으로 가시지요.”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영혼의 분신을 찾아가지 마세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세요. 에너지를 증폭시키면서 기다리세요.”
 


커피 한잔을 다 마신 후 판시판 산허리를 짙게 두르고 있는 구름 속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영혼의 고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휘두르고 있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나를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것은 표류자의 마음이다. 범려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과는 판이하다. 범려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 사라진 것이다.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결정한 것이다.

‘‘…으로부터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짓지 못하는 표류자들의 공허한 선언일 따름이다.’


‘나는 표류자이다, 표류자로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인가?’

그러자 ‘또 하나의 나’는 내게 말했다.

‘절망한 자에게는 매 순간이 미지의 순간이다. 매 순간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 그의 삶이다. 절망한 자 그리고 희망을 버린 자는 이 순간을 강렬하게 산다. 이 순간만이 삶을 변형시킬 수 있다.’


 ‘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나그네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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