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질을 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었다. 그간 주 52시간 근무제가 주요 토픽이었던 탓일지, 아니면 내가 크게 관심이 없었던 탓일지. 시행일 전날에서야 개정 근로기준법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게 되었다. 성희롱을 제외하면 포괄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자국 법에 산입한 나라는 몇 없다고 한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성숙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어야 '직장 내 괴롭힘(Workplace Harassment)'를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거나 열심히 경제발전을 위해 달려가는 도중에는 많은 경우 직장 내 괴롭힘을 필요악으로 간주한다.
이 분야에서 단연 처벌 강도가 높은 나라는 호주다. 2011년 '브로디법'이 통과되면서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에게 최대 징역 10년을 구형할 수 있게 되었다. 스웨덴은 1994년 세계 최초로 '근로자에게 부당한 괴로움을 주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였고, 영국에는 '불안감과 근심을 주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면서 가해자에게 최대 징역 5년을 구형할 수 있는 법이 마련되어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신고 당한 가해자에게 직장 내 괴롭힘 여부를 입증할 책임이 부과된다. '무죄 추정의 원칙'과는 반대로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수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이미 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모두 비슷한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규정을 각 회사에서 개별적으로 취업규칙으로 제정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소규모 사업장은 대상에서 제외되어 법의 사각지대가 생긴다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이것저것 의무를 부과하긴 하지만 이를 위반했을 시의 처벌규정이 없어 강제성이 없다는 것이 세 번째이다.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의 범주가 너무 좁게 설정되는 것도 한계점이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이하 "직장 내 괴롭힘"이라 한다)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위와 같이 7월 16일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서는 포괄적인 의미의 "직장 내 괴롭힘(Workplace Harassment)"가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Workplace Harassment) 일종인 "권력형 괴롭힘(Power Harassment)"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여 금지한다. 권력형 괴롭힘(Power Harassment)는 '장유유서'에 길들여진 동아시아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직장 내 괴롭힘이다. 일본에서는 성희롱(Sexual Harassment > 세쿠하라)와 마찬가지로 '파워하라'라고 줄여서 부르며, 우리보다 일찍 인식이 생겨나고 법으로 제정되었다. 이번 개정 근로기준법 역시 사용자에 대한 직접 처벌 없이 '직장 내 괴롭힘이 없는 환경 조성'을 목적으로 'Power Harassment'를 금지한다는 점에서 일본법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설명과 판례는 여기)
아마 내가 당했던 일들은 (증거를 꼬박꼬박 모았다 하더라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지 못할 것이다. 권력 우위를 이용하여 괴롭혔다고 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괴롭힘의 가해자는 기분파 독불장군이었다.
처음엔 성공을 위해 주변을 모두 망가뜨리는 소시오패스의 일종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변 사람의 평판을 안 좋게 만드는 점은 소시오패스와 유사하지만, 피해망상이 심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일삼으며 본인 역시 정신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그리고 지능이 높지도 않으니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특성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타임을 험담하고 모함하길 좋아하지만 그 험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험담의 대상자에게 전달하는 멍청한 소시오패스는 아마 없으리라)
이 사람에게는 '독불장군'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린다. 차라리 부장이 그랬다면 아래 직원들끼리 똘똘 뭉쳐서 버틸만 했을까. 연차는 오래 되어 고집도 세고 기존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데 일머리는 없고, 고집이 세니 사내 인간관계도 그닥 원만하지 못한 중간관리자. 협력사에 전화해서 일 제대로 하라고 소리질렀다는 걸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
이 사람의 타겟은 주로 힘이 없는 파견사원들이었다. 아마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 정사원으로 신입을 받은 적이 없어서 그랬을 거다. 자연스럽게 나도 타겟이 되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잠자코 일을 배우려 했고 다음 6개월은 오락가락하는 기분에 맞춰주려고 노력도 해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그 사람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맞춰주지 않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엄청 싫어하더라. 사사건건 트집에 메일 감시는 기본, 전화하는 소리까지 엿듣고 별의 별 걸 다 아니꼬와하며 시비를 걸었다.
맨날 울고 힘들어해도 위에서는 "얘가 나쁜 애는 아닌데 서로 좀 잘 지내봐"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직급이 차이가 나고, 당하는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은 이게 분명 권력형 괴롭힘이라고 느끼는데 부서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파워하라로 찔러버리려고 카톡도 모으고 사내 메신저도 모으고 부장한테 보내려고 쓰다 만 카톡 내용도 모았었다. 그런데 작년 추석 직전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는 다 부질없는 짓인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 때도 어김없이 사무실에서 내게 소리를 질렀고 잠깐 이야기 좀 하자며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러더니 회의실에서 날 앞에 앉혀놓고는 자기가 자기 분에 못 이겨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손까지 부들부들 떨더라. 그 전까지는 그게 정말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었는데, 그 순간 '나이 사십 먹고 부하 직원 상대로 본인 감정 컨트롤 하나 못해서 저렇게 손을 부들대고 있나' 싶어서 우스워 보였다. 그리고 며칠 후였나? 또 불러내서 이것저것 별 시덥지도 않은 걸로 트집 잡으면서 "내가 그래서 그걸 사람들한테 했더니 그 사람들도 ㅇㅇ씨가 이상하대~" 라나 뭐라나. 내가 이 사람이 뭐라고 내 감정 소모하면서 2년을 버텼나 싶고, 이런 사람 물 먹이려고 증거 모으는 짓도 모두 부질없고 하찮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에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를 간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듯 어딜 가나 이상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 그런 이상한 사람들을 조직 차원에서 잘 컨트롤 하는 조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독불장군' 역시 매니저가 잘 컨트롤 했다면 이렇게까지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본부장은 본사에서 파견나와서 2-3년마다 로테이션 되고, 그 아래에서 조직을 잘 통솔해야 할 부장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현장에서 사무직 부장으로 발령나는 건 일종의 좌천이나 마찬가지기에, 자기 자리를 지키려면 자기 아래에 유능한 직원을 키우지 않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부장 입장에서는 자신의 앞잡이가 되어 주면서 자기 앞길을 위협하지 않는 인물이 바로 '독불장군'이었던 셈인데, 옆에서 보고 있자면 자식 잘못 키운 부모와 엇나간 자식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요약하자면 '직장 내 괴롭힘'을 '권력형 괴롭힘'으로만 국한한다면 나와 비슷한 사례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권력형 괴롭힘'으로 한정함으로써 많은 괴롭힘 사례들이 여러 괴롭힘 유형이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트러블'로 간주될 소지가 크다. 내가 겪은 사례에서도 부장이 '독불장군'의 문제점을 아예 몰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독불장군'의 잘못된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게 '파워하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일본계 회사였기에 파워하라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퍼져 있었다)
(참고) 11가지 직장 내 괴롭힘 유형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안 내용으로 대한민국에서 꼰대들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괴롭힘'에 대한 인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는 마련되었다고 본다. 미흡한 점이 많은 법령이기에 개선을 향한 목소리가 법 제정 이전보다 커질 수도 있다. 나는 향후 '근로기준법 제76조의2' 조항이 권력형 괴롭힘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형태의 '직장 내 괴롭힘'을 포함하는 형태로 나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