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의 철학자, 바오』 11쪽
-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결국 큰 아이를 울려버렸다.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아이를 몇 번이고 다그치다 못 참고 결국 우악스럽게 팔을 부여잡고 집에 들어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아이에게 뭘 잘했다고 우냐고, 얼른 울음 그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늘 그렇듯이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요.' 하며 먼저 와서 사과하는 아이에게 네 팔을 너무 세게 잡아서, 화내서, 소리 질러서 엄마도 미안하다고 뒤늦은 사과를 했다. 눈물의 의미가 다르긴 하겠지만 우는 아이에게 한 번도 눈물이 어떤 마음이 들게 하는지 설명해 준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대부분 시끄러우니, 듣기 싫으니, 네가 잘못해놓고 왜 우냐고 말한 기억밖에 없다. 내가 보는 아이의 눈물은 이렇듯 부정적일 때가 많다. 그러니 말보다 울음으로 감정표현을 더 많이 하는 아이가 눈물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다.
언젠가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런 나를 보며 아이가 다가와 "엄마 왜 울어?" 묻더니 "슬퍼서."라고 대답하자 내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 양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면서 "엄마, 울지 마." 그러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나를 안고 어깨까지 토닥여 주었다. 다섯 살 아이가 엄마인 나에게 해 준 말과 행동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안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왜 우냐고 물으면 "슬퍼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억울할 때면 장황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마지막에도 '슬퍼서.'라고 말한다.
바오에게 '슬픈 마음을 씻어주는' 눈물의 의미를 알려준 어른이 있다는 사실 앞에 내 마음이 쿵, 하고 떨어졌다. 분명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해졌던 기분을 안다. 그럼에도 아이의 눈물은 무조건 떼를 쓰는 이유뿐이라고 단정 지었다. 떼를 썼건, 나와 다투다 그랬건, 유치원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서 그랬건 눈물은 창피한 게 아니라고 여러 의미가 있다고 아이에게 가르쳐 주지 못했다.
바오가 배운 눈물의 의미를 몰랐더라면 나 역시 아이에게 눈물의 다른 의미를 알려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눈물은 나쁜 의미일 때가 더 많다고 다그쳤을 것이며, 아이도 그렇게 인식하며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아이가 숨죽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 때가 있다. 소리 내서 우는 울음은 억울함, 저항, 민망함, 요구라는 복잡 미묘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소리 없는 울음은 진짜 속상할 때의 울음이란 걸 알기에 더 당황스럽다. 이제 그렇게 우는 아이에게 개운해지는 눈물도 있다고, '슬픈 마음을 씻어주는' 눈물도 있다고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울지 말라는 다그침도 줄여 볼 생각이다. 울지 말라고 했을 때 한 번에 그치지도 않을 뿐더러, 말을 듣지 않는다고 못 참고 아이를 더 울렸던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이의 눈물을 지켜봐주는 인내를 배워볼 생각이다. 그리고 울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아이의 감정을 먼저 묻고 읽는 연습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