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몇 편 읽었지만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소설들을 다 우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이미 읽은 그의 소설을 오랜만에 펼쳤음에도 약간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우울함에 잠식당할까 싶어서다. 그런데 자연과 사춘기 소년들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오히려 감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설이었나. 한스의 예민한 감성처럼 풍경들이 그의 시선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완전히 새로운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한스 기벤라트의 재능이 뛰어나서 마을 전체가 그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주 시험'에 합격해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그후 튀빙겐 대학에 들어간 다음 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 당시의 재능 있는 아이들이 밟는 최고의 절차였기 때문에 한스도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에서 치열하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스가 공부하는 과정만 봐도 머리가 아파온다. 오늘날에도 저렇게 공부하는 애들이 허다하겠지. 저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적도, 많은 사람들의 기대도 받아본 적이 없기에 한스의 재능과 담대함이 기특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한스를 지켜볼 때면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늘 내재했다.
예민함. 한스 기벤라트 뿐만 아니라 같은 신학교 학생들이지만 이제 소년티도 벗겨지지 않은 아이들의 내면이 이토록 예민하고 불완전하면서도 때론 영악하고 순수할 수 있는지 놀라고 있었다. 내가 저 소년들의 나이에도 그랬을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분명 당시에는 나름대로의 심각한 고민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던 느낌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신학교 생활만 잘 마치면 평생 국가에서 보호해주는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들끓는 영혼과 내면을 어찌할 바 몰라 헤매는 모습에서 마음이 찡하기도 하고 쿵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교사 비트리히를 제외하면 그들 중 아무도 소년의 여윈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미소 뒤에 물에 빠져 가라앉는 영혼이 아파하고 있으며,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차 죽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도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과 학교가 이 연약한 존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
무지막지하게 몰아댄 망아지는 길에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141쪽)
나 역시 영특한 한스가 기특하면서도 때론 자만심과 우쭐함이 넘칠 때면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하일너와의 우정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한스보다 더 예민하면서도 기질은 완전 다른 하일너가 한스의 시간을 자꾸 뺏는 것이,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한스 기벤라트의 학년에서도 두세 명이 모습을 감추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헬라스 방의 아이들이었다. (106쪽)
그러나 그건 역시나 고리타분한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힌딩거라는 아이가 호수에 빠져 죽었을 때만 해도 나머지 헬라스 방 아이들 두 명에 한스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일너는 불안불안했지만 퇴학을 당할 거란 예상을 못해서인지 모습을 감춘 아이 두 명 째가 되었을 땐 오히려 조금 안도했다. 한스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한스의 예민한 내면을 낱낱이 들여다봤으면서도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한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제 다시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걸 한스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 아주 잠깐의 자유가 허락되었을 때 노닐던 곳을 추억하는 모습을 보면서야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한스는 다시는 신학생이 될 수 없음을. 그리고 이전에 영특하고 기특했던, 마을 사람들의 촉망을 받던 소년이 될 수 없음을 말이다.
이어지는 한스의 짧고 가슴 아픈 첫사랑과 기계수습공의 생활. 분명 이 소설을 읽었음에도 결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한스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술에 취해 혼자 집에 돌아오다 물에 빠져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걸 보고 순간 멍해졌다. 자살인지 실족사인지 알 수 없지만 촉망받던 한 소년의 마지막은 잔인했고 안타깝고 허망했다. 한스가 신학생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일들을 겪을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좀 더 시간이 있어서 삶을 여유롭게 바라보길 바랐다. 신학교를 관두고 돌아온 아들이 실패자라 생각하는 아버지가 위로가 못 되더라도, 한스의 공부를 열심히 도와줬던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그를 이해하고 용기를 줄 수 있길 바랐다. 혼란스러운 외로움이 한스 혼자만이 것이 아님을, 누군가가 손을 뻗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런 손길 한 번 느껴보지 못하고 한스라는 꽃은 떨어져 시들어버렸다. 왜 한스에게 그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게 했는지, 있는 그대로의 한스를 인정하고, 영특함이 발휘하지 못한 것에만 아쉬워하는지 비난할 수 없었다. 나도 계속 한스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좀 쉬고 나서 공부쪽으로 다시 도전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늘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한번이라도 한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경험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석연찮은 죽음으로 이끈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어른들이 기특해 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이유로 무지막지하게 공부를 해 댄 한스가 실패했을 때라도 그런 기회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아이가 그랬다고 한다면 나 역시 실망감에 한동안 마주하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이렇듯 이런저런 가능성과 아쉬움이 교차하기에 자신을 한 번 더 펼쳐볼 기회를 갖지 못한 한스의 죽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을 내가 원하는 길로 몰아세우지 않길, 한스를 보며 가슴 아픈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