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모님의 심부름을 하다가 실수를 할 때면 듣게 될 잔소리에 울상지은 적이 많았다. 나는 뭘 하든 똑부러지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늘 소심하고 실수 잘하고 잔소리에 심히 울적해하는 아이었다. 만약 엄마가 물 한동이를 이고 논이든 밭이든 가져 오라고 했을 때 무사히 가지 못하고 엎질러 버렸다면 어땠을까? 혼날 것이 무서워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먼저 든 것은 물 한동이를 힘겹게 이고 가는 코끼리 아저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코끼리 아저씨는 100개의 물방울이 담긴 양동이를 이고 간다. 무슨 이유 때문에, 어디로 물방울을 이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물방울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물방울들이 떨어지진 않을까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을 보여주듯 구르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는 가운데도 목마른 개미들에게 물방울을 나눠주는 인정 많은 코끼리 아저씨다. 그렇게 힘겹게 지켜온 얼마 남지 않은 물방울은 다른 동물들이 먹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해서 결국 빈 물동이가 되고 만다. 아저씨는 단박에 울상이 된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 지켜온 물방울이었는데 하나도 남지 않게 되자 코끼리 아저씨는 눈물을 흘린다.
왜 그 물방울들을 지켜야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울고 있는 코끼리 아저씨를 돕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코끼리 아저씨는 가득 채워진 물동이를 이고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코끼리 아저씨가 도착한 곳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이었다. '아빠' 하고 달려드는 새끼 코끼리들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 그렇게 힘겨운 길을 지나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코끼리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모를 때, 아빠인 코끼리 아저씨가 아닌 그 대상에 나를 집어넣기만 했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저렇게 물방울을 모두 잃어버리고 빈 물동이를 안고 있었다면 엉엉 울기 바빴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빠의 입장이라 생각하고 코끼리 아저씨를 보니 늘 고생만 했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한량인 아버지 때문에 엄마 혼자 9남매를 거의 키우다시피 했는데, 우리를 키우면서 마주쳤을 막막함과 두려움을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식들을 위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부모님. 혼자 남은 엄마에게 우리를 어떻게 키웠냐고,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말씀드리면 엄마는 되레 잘해준 것도 없는데 니들이 잘 커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옛날이니 그렇게 막 키웠지 지금 같으면 못 키웠을 거라고 말이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무척 힘겹게 낳고 보니 새삼 엄마의 심정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마처럼, 이 책속의 코끼리 아저씨처럼 나도 내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대답할 수 없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이 커져감에 따라 자연스레 그런 마음과 행동들이 나올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견뎌온 시간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코끼리 아저씨처럼 내가 알지 못한 부모님의 마음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