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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바탕이 되어 이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줌파 라히리 <그저 좋은 사람>

by 안녕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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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끝장을 덮고 나서 짙은 여운으로 멍하게 있었던 적이 얼마만이던가. 책 속의 인물이나 배경에 빙의되어 현재의 나를 잃어버린 것도. 마음이 먹먹한 가운데 책을 읽고 뿌듯함을 느끼는 이유를 다시 경험하게 되어 새롭다. 이 느낌. 이 고요. 이 벅참을 얼마 만에 느껴보던가. 정말 멋진 작품을 만났을 때 가능한 일 인만큼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반복되는 육아 때문에 한권의 책을 굉장히 오랫동안 읽었다. 시간상으로는 오랫동안이지만 세 호흡 만에 읽어 버렸다. 그만큼 꼼꼼하게 읽었고, 다음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 전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음미하는 시간이 넉넉했다는 말이다. 처음엔 단편인지 모르고 인물의 연관성을 계속 생각하며 읽다 당황하기도 했지만 인물이 바뀌는 단편이나 혹은 연결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 경계가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저자의 책을 몇 장만 읽어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은 물론 드러내기 싫은 내 마음 속 이야기를 들켜버린 기분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왜 이렇게 내 마음속에 들어왔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명확하게 그림을 그리듯 드러내는 묘사였다. 첫번째 이야기 「길들지 않은 땅」 에서부터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읽은 탓도 있고 저자가 그려내는 그림이 온전히 머릿속에 그려진 탓이었다. 혼자 된 아버지와 큰 아이 아카시의 관계,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들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이야기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를 탁월하게 묘사해냈다. 불안한 요소들이 가득한 환경 가운데 이런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다는 데 놀라면서 내 마음을 들키는 문구들을 많이 만나 움찔거리기도 했다.


소설의 대부분은 낯선 타국에서 적응해야 하는 이방인들의 이야기다. 때론 낯선 환경이 주는 두려움도 엄습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의 내면을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상부터 다르다는 것에 따르는 차이와 각각의 생각들이 뒤엉켜 독자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철저히 이방인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면서도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행보에 부러움이 들기도 했다.


책장을 덮고도 한참 동안 정신을 놓게 했던, 깊은 밤 어두운 벽을 바라보며 한참 무언가를 생각했던 《헤마와 코쉭》 이야기는 먹먹함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그들의 인연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는 예감은 처음부터 없었다. 소설임에도 너무 사실적이라 인위적으로 엮어간다는 느낌이 없어서였다. 헤마와 코쉭이 먼 거리와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났을 때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묘한 복선이 그들이 함께할 수 없음을 예감하게 했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코쉭의 죽음이 드러났을 때 굉장히 마음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마음속에 붙들고 있던 희망의 끈이 툭하고 끊어지다 못해 지하 몇 미터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 먹먹함은 내가 처해있는 이 삶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침울해 버렸다.


그럼에도 그들이 재회한 로마를 둘러보며 나 혼자 배낭여행을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시기는 결혼하기 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뒤 받은 퇴직금으로 여행을 갔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내가 퇴사했을 땐 결혼한 지 2개월이 된 시점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아 배낭여행 같은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헤마와 코쉭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20대 내내 열망하고 꿈꿨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 유럽 배낭여행이 생뚱맞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이 소설이 얼마나 내 마음 깊이 들어와 휘젓고 갔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가족 간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사랑이 바탕이 되어 이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색깔이 너무 다채로워서 밑바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지라도 책장을 덮고 나서 저자가 표면위로 높이 띄우지 않은 사랑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현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지나가면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랑을 주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앞으로 그 사랑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사실을 깨닫자 앞으로의 삶이 어둡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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