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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반짝 Nov 12. 2019

아이가 내 책을 찢었다. _책들의 수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산소리>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책을 찢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찢은 순간을 목격했다면 아마 아이에게 엄마 책을 찢으면 어떡하냐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뒤늦게 발견한 뒤라 그냥 마음을 툭 놔버리고 엄마 책 찢지 말라고 주의만 주고 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책을 볼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다.   


책을 좋아하면서부터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책에 낙서하거나 접히거나 더러워지는 걸 절대 못 봤다. 이상하게 깔끔한 성격도 아니고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먼 나인데 책장 정리만큼은 나름대로 생각과 고집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참을 책의 겉모습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다. 책을 읽다 엎어놓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띠지도 소중하게 보관하며, 양장본에 달려있는 책 줄도 모양 그대로 유지하느라 가려진 글자를 유추하며 읽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심히 피곤한 행동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한 번 크게 데일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내가 책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진 모습을 보면 가끔 생소하기도 하다. 스스로 예감한 것처럼 어떤 큰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경험 때문에 책의 겉모습에 많이 너그러워졌던 것 같다. 출판사에 근무하기 전까지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지 그런 과정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소중하게 산 책이 구겨지거나 찍혀서 오면 내 블로그에 바로 올려서 온라인 서점을 비난하면서 어이없어 했다. 다른 사람들도 동조해주니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책이 심하게 상해서 오는 걸 달가워 할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교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근무하면서 그렇게 반품되어 돌아오는 책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폐기되는 것을 보며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책들까지 모조리 반품시키고 비난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때부터 책이 좀 상해서 오거나 구겨져서 와도 읽기에 큰 상관이 없다면, 내가 이 책을 반품하면 폐기되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냥 읽었다. 그러다보니 책의 겉모습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책에 밑줄을 긋거나 책의 겉장으로 페이지를 표시한다거나 쫙 펴서 보는 일은 없다. 그래도 종종 읽은 곳의 페이지를 표시할 메모지가 없으면 엎어 놓기도 하고 책을 읽다 상해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래서 아이가 내 책을 찢어 놨을 때도 그냥 마음을 비워버렸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이의 손에 닿는 내 책이 거실 여기저기에 있어 아이가 마구 꺼내서 펼칠 때면 엄마 책은 만지지 말라고 단호하게 주의를 준다. 결과물에 너그러운 것과 과정에 너그러운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정가 3만원인 카프카의 책 등을 아주 멋지게 찢어 놨다.



얼마 전에는 화장실에서 보던 책을 휴지걸이 위에 놓아두고 다른 일을 하다 그대로 그 책이 변기에 빠진 일이 있었다. 다행히 깨끗한 변기라서 순간적으로 책을 바로 건져내서 수돗물에 얼른 헹구고 말렸지만 과연 그 책이 내가 아끼는 책이었다면, 지금은 출간되지 않는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아마 그 책을 볼 때마다 우울해서 피하고 말 것이다. 다행히 그 책은 내가 굳이 소장해도 되지 않을 책이었고 다 읽고 난 다음에 지인에게 주려고 했던 책인데 그런 일이 있었으니 줄 수도 없어서(그렇게 큰 티가 나지 않지만) 그냥 내 책장에 보관하고 있다.


 

 

 

책이 많다보니 예전에는 책장의 책 먼지도 자주 털어주고 아끼곤 했었는데 점점 무심해지곤 한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기에 나에게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책을 읽는 과정과 내용에 더 집중하는 것. 여전히 책을 깨끗이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이가 찢은 책을 보고도 크게 화내지 않는 내 모습에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찢는다면 그 뒤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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