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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반짝 Aug 11. 2020

나를 즐겁게 해주는 공간_안방 입구를 서재로 꾸미다.


안방 입구에는 오랫동안 모은 음반들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장난감처럼 빼서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깨지고, 엉키고, 섞여버렸다. 그래서 되는대로 쑤셔박아 놓고 유지하던 중이었고, 언젠간 싹 빼서 정리해야지 했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다 밤 12시쯤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가던 중 음반을 정리해야겠다는 느낌이 왔다. 집안일을 꼼꼼하게 하지 못하는 나는 대부분 느낌이 올 때 해치우는 편인데, 이 집으로 이사한지 일 년 반 만에 그 느낌이란 게 왔다. 그리고 약 5시간에 걸쳐 음반을 하나하나 꺼내 닦고(먼지가 어마어마했다), 장르별로 분류하고, 짝이 안 맞는 음반을 찾았으며, 케이스가 깨진 것과 짝이 맞지 않는 것, 그리고 슬프지만 더 이상 들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음반을 모두 빼냈다. 새벽 5시 쯤 말끔히 정리된 음반을 보며 잠이 들었는데,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나보니 그냥 지저분했다. 더이상 음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 입구라고 하지만 현관에서 들어와서 거실로 들어설 때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을 어떻게 깔끔하게 만들까 고민하다 음반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책장을 들이기로 했다.



이곳에 있던 음반은 안방 문 뒤로 옮겼다. 잘 보이지도 않고, 나름 먼지를 닦고 정리했으니 그럭저럭 타협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벽의 사이즈를 재서 맘에 드는 책장을 골라서 주문을 했다. DIY 제품이라 조립 서비스를 신청하면 추가로 18,000원의 비용이 들었다. 전동드릴도 있겠다, 남편이 조립을 잘 하니 남편에게 맡기기로 하고 조립을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남편이 연속 3일을 야근을 하는 바람에 책장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현관 밖에서 3일이나 방치되었다. 1층이라 누가 가져갈 염려가 있을까 싶지만 택배를 한 번도 분실해 본 적이 없기에 분실의 우려보다, 언제 남편이 책장을 조립해 줄지 조바심이 났다.



드디어 남편이 야근을 하고 일찍 들어온 날 저녁을 먹고 조립을 시작했다. 여러 개의 박스에서 제품을 꺼내고 요리조리 맞춰보더니 아이들과 함께 조립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끼워야 할 나사가 정말 한 가득이라 둘째는 나사를 건네주고 첫째는 선반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 사이 나는 저녁 설거지를 했고, 책장이 완성되어 갈 즈음 남편이 혼자 이상한 말을 내 뱉더니 선반을 거꾸로 끼웠다며 다시 모두 빼서 새로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아빠의 힘듦을 이해하는지 모르는지 그저 웃으며 즐거워했고, 그렇게 완성된 책장이 드디어 빈 벽에 세워졌다.


선반의 형태를 띤 책장이라 구입하기 전부터 벽에 고정을 해야 한다는 동의서를 받았다. 앞으로 쓰러질 염려가 있으니 주의라서 벽 고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선반과 벽 사이즈가 정말 꼭 맞았다. 덕분에 벽에 고정을 할 필요도 없이 선반이 스스로 고정 역할까지 해서 마음에 들었다.



책장이 현관에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이미 이곳에 정리할 책도 정해 놨다. 바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인데, 전집이 전체적으로 블랙이라 이 책장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전집을 한 권씩 모으다 보니 여기저기 책장에 흩어져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 곳으로 모두 모아봤다. 전집은 모두 142권. 하지만 나중에 서재방(이 곳은 3면이 모두 책이다)에서 숨어 있던 3권의 책을 더 찾아서 총 145권이 되었다.




책을 꽂고 보니 블랙과 잘 어울려서 검은색 책들 위주로 꽂기로 했다. 나머지 빈 책장은 서재방에서 찾아낸 검은색 책들을 모았다. 그리고 고장 난 줄 알았던 오디오도 블랙인 관계로 이곳으로 옮기고(코드는 안방 문을 열면 바로 꽂을 수 있다), 안방의 음반을 꺼내서 듣기로 했다.


<초한지> 세트가 너무 흰색이긴 하지만 <삼국지> 세트랑 함께 꽂고 싶어서 나란히 함께 두었다. 그리고 정말 꼭 완독해 보고 싶은 책 중의 하나인 <율리시스>도 묵직하게 전시했다. 매일 보다 보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멋 없지만 책장의 이름도 지어봤다. 블랙 에디션.


그리고 빈벽을 그냥 두지 못하는 성격이라(빈벽은 모두 책으로 채워야 하는 병을 앓고 있다) 주방에 있던 고흐 액자 퍼즐을 올려봤다. 약 20년 전에 맞춘 1,000조각의 퍼즐 액자가 항상 여기저기 옮겨다녔는데 이제야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든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안방을 들락거리고, 거실에서 보이는 이 장소는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선반의 모서리에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생각보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모서리와 닿지 않았고, 아이들도 평소처럼 그냥 지나치기 때문에 마음을 놓게 되었다.


딱 하나의 단점은 깔끔하게 정리를 한 탓에 책이 바로 뽑아져 봐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서재방에 이미 읽어야 할 책들이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고, 이 책장은 전시용에 가깝기도 하고, 좀 과장하자면 마음에 지각변동(?)이 생길 때 읽어야 할 책들이 대부분이긴 하다. 그럼에도 같은 시리즈의 책을 한 곳으로 모았다는 후련함과 자주 보게되는 책장이 예쁘다는 사실이 나를 즐겁게 해준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공간.


요즘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필요없는 물건을 버리면서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비움이 먼저라는 사실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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