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소설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빨려들었던 이야기들이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것 같아서 잠시 동안 천장을 보며 멍하니 그들을 생각했다. 체스에 빠진 사내와 한 남자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 무언가 다른듯하면서도 닮은 그들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지 모르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살다보니 잊은 것도 있겠지만 내 인생을 바꿀 만큼 강렬한 만남이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체스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만남은 강렬하다. 주인공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 안에서 만나게 되는 B박사는 체스가 주는 중독성과 강박관념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인생을 모두 걸어버릴 만큼 강렬한 만남이 있었다.
액자형식을 취하는 이 소설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우연히 체스 게임을 하게 되었지만 자신을 도와주면서 만나게 된 B박사가 체스를 배우게 된 계기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 인간의 생존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될 때쯤 손에 쥐게 된 체스 교본이 그를 살렸다. 그렇게 배운 체스이기에 거만한 체스 챔피언인 첸토비치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첸토비치를 보면서 자꾸 히틀러의 이미지가 겹쳐졌는데 체스는 결코 쉬운 게임이 아님을 온 몸으로 경험한 것 같았다.
체스란 우연과는 동떨어진 순전한 두뇌싸움인지라 자기 자신과 맞서서 게임을 한다는 건 부조리하다는 거죠. 체스의 매력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상이한 두뇌에서 전략이 나온다는 데 있거든요. (60쪽)
두 번째 단편「낯선 여인의 편지」는 지독하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한 남자를 오랫동안 사랑한 한 여인의 이야기다. 짝사랑과 스토커의 경계에 있어서 어느 쪽으로 비중을 더 두느냐에 따라 이 여인의 사랑이 완전히 갈려버린다. 독자는 남자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 진심임을 알게 되지만,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겨우 몇 번 스친 것으로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무리였다. 혼자 키워온 사랑이기에 그 남자가 자신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여자 중 한 사람으로 판단해도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고집스러울 정도로 밝히지 않고 그가 스스로 알아보기를 바랐던 그녀의 순정은 사실 당시 남자들의 사랑의 순도를 시험하기 위해 던진 질문인 동시에 이중적인 성도덕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처럼 그녀가 그런 태도밖에 취할 수 없었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이 쌓이고 쌓이다 편지로밖에 고백되지 못할 때의 안타까움. 그리고 끝이 훤히 보이는 그 사랑이 그저 그런 사랑을 하다 떠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할 뿐이었다.
오로지 당신, 오직 당신만이 저를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만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45쪽)
목숨을 건 고백, 모든 걸 바친 체스 게임. 이렇게 무엇엔가 깊이 빠져버린 두 이야기를 만나고 보니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이미 사라져 버린 이야기를 나만, 특별하게, 우연히 만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