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화분 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봤다. 평소라면 별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 책을 읽은 뒤라 자세히 쳐다보게 되었고 이름이 뭔지 궁금했다. 나비라면 겨우 배추흰나비, 호랑나비 정도만 알고 있었고 어렸을 때 호기심에 나비 날개를 잡았다가 손에 묻었던 안 좋은 기억이 있어 나비를 그렇게 반기지 않는다. 나방인지 나비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손에 비벼지던 그 기억은 여전히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든다. 더불어 나비를 해쳤다는 죄책감과 더해져 나비에 관한 기억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을 쥐어짜다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일화가 있었다. 초등학생(난 국민학생 세대지만) 때 학교와 집이 멀었지만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시골길을 늘 걸어 다녔다. 그러다 늘 같은 물가에서만 보였던 코발트블루 같기도 하고 프러시안 블루 같기도 한 나비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에겐 잠자리채도 사치라서 오로지 믿을 건 손밖에 없었는데 절대 잡을 수 없었던 나비라 만인의 나비처럼 느껴졌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 장소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나비. 새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었는데 저자의 글을 통해서 더듬다보니 그런 기억도 저장되어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을 뭐라고 해야 할까? 저자는 대학의 부교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분야에 몸담고 있지만 그런 저자가 쓴 나비에 관한 글을 분류하기가 애매했다. 나비에 관해 완전히 전문가답다고 할 수 없었지만 나비와 자연과 한데 묶어 바라보는 시선은 굉장히 날카로웠다. 추천사를 통해 겨우 이런 글을 ‘생태 문학’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자는 ‘문학에서 출발했으면 글쓰기라는 길을 걷다가 대자연으로 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후 한 번도 그 창 앞을 떠난 적이 없’는 작가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나비의 종을 구별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비를 보기 위해 기꺼이 먼 거리를 여행하고 기다리고 환희에 찬 만남을 이야기하는 데서 전문가, 아마추어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비를 사랑하고 자연 속에서 나비를 보는 것을 즐기며 희귀한 나비를 직접 보고 기록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나비가 좋아 직접 그림을 그리면서 눈과 손과 머릿속에 새겨 넣는데 사진과 비교해보면 꽤나 사실적이다. 이 나비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자세히 쳐다보았을까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나비를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나는 그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연구자들의 논문을 읽고 들판에 나가 나의 눈으로 아름다운 이들을 만나고 그 친구들의 성격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나를 매료시키는 나비의 수수께끼는 각각의 생명이지 생’물‘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저자는 자연 속에서 만나는 나비를 가장 좋아했다.
그의 이런 진지한 관찰과 사료를 타인이 공감할거라는 전제 하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학교에서 나비를 관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동료들은 “학교에 나비가 있어?” 하고 물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며 교정을 오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초가을 풀밭에 홀로 쪼그려 앉아 있는 바보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디스하지만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가 다를 뿐, 저자가 바보 같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엔 나비를 관찰해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어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의 나비와 자연에 관한 진지한 태도, 그런 시간이 쌓이고 쌓여 삶과 적용시키는 성찰에 나와 취향은 다르지만 그의 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사람들은 ‘나라’가 땅을 의미하지만, 그 위에 복수의 생명이 어울려 살 때 그 땅이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작은 밤색왕나비가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 역시 기억할 수 있는 고향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130쪽)
나비와 대만의 역사가 얽혀 들어가면서 드러난 저자의 생각을 읽다 보면 단순히 나비에 관한 책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렇게 다양하고 특이한 나비가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진지하게 삶에 대해, 이 세계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태문학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