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시차의 눈을 달랜다>
시를 읽을 때 시어에 소리를 덧입히고 안 입히고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껴서인지, 시집을 마주하면 벌써부터 목이 칼칼해진다. 소리를 내어 읽는다는 것은 시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평소에 다물고 있던 입을 여느라 목이 잠기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시를 조금 읽는다고 해서 목이 아프다고 푸념하는 것인지, 소리 내어 읽는 것에 대해 조금 계면쩍어 지기도 하다. 내가 시에 소리를 덧입히는 시간보다,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들의 노고가 깃든 시간이 비교될 수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칼칼해지려는 목을 가다듬고 시집을 펼쳐 명랑을 가장해 시를 읽어 내려갔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시집이라고 하니, 관심부터 남달라진다. 상을 받은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기보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 너라, 유독 시집에는 경우가 뒤집어지곤 한다.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시를 읽으면서도 깊은 공감을 하지 못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시는 내게 어려운 장르이고, 읽는 것조차 버거운 문학이다. 거기다 상까지 받은 시집이라고 하면, 주눅이 들면서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떠한 시들을 썼기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 까란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문으로 바뀌고 말았다.
시에 소리를 덧입혀 재탄생하게 만드는 또 다른 매력은 <시차의 눈을 달랜다>의 시집에 적용되지 않는 듯 했다. 낯선 시들에 적응하고, 시인의 내면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 몇 편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일쑤다. 그것을 알기에 첫 시부터 소리 내어 읽었건만, 몇 번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아도 시의 의미는 내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는 세계의 언저리를 보여주고 읊어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시들이 가득했다. 이 시집의 제목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나와 시인의 '시차'를 달래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의 시를 이해하기엔, 그의 시를 온전히 느끼기엔 내게 부족한 것투성이라는 자괴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좌절했던 것은, 소리를 덧입혀도 시어가 내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소리를 덧입혔을 때 달콤하게 다가오는 시 때문에 시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쳤건만, 김경주의 시집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시어가 입에 감기지 않았고, 적절한 곳에서 끊이지도 않았다. 읽다 보면 앞 뒤 언어가 꼬이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헤매다 보니 시가 더 엉켜버린 느낌이었다. 거기다 운율에 맡긴 시들보다, 산문처럼 무한히 펼쳐진 시들이 더 많아 나의 어려움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의 의미를 알아가고, 시인의 내면으로 혹은 시들이 드러내고 있는 세계로 동행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워 보였다. 겨우겨우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시어들에 메모지를 붙이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아등바등 시를 만날 뿐이었다.
김경주 시인의 시들과의 만남이 처음이듯이 순차적으로 다가오는 낯선 감정에 부응하듯, 그의 시는 난해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조금씩 그의 시의 깊이를 느끼고, 무언가 알듯 말듯 한 세계를 음미해 나간다는 기분이 느껴진 것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을 때였다. 목이 칼칼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멈추지 않기 위해 중얼거리듯 시를 읽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시어는 꼬이고 엉켜버린 시들을 풀어가기 보다 그대로 전진하고 있을 때, 시어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발견을 일궈냈다는 기쁨보다, 늘 더디게 깨달음을 얻어 가는 내가 여전히 힘겨웠다. 한참을 읽어야 그런 느낌이 겨우 오기 마련이고, 그 느낌은 시를 끝까지 대하기 전에 또 다른 혼란을 주기 마련이었다.
시를 읽으며 반가움을 드러낼 때는 내가 가진 경험에 대한 드러냄이 등장할 때다. 김경주 시인의 시에서 가장 먼저 공감을 느꼈던 부분은 <바늘의 무렵>의 첫 연,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다니는 바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였다.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바늘이 몸속에 들어가면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죽어간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이 났다. 떠도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 시에서 드러나고 있어 신기하면서도 학창시절의 친구의 말에 신뢰를 던져 주지 못한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시인은 바늘을 삼킨 자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불에 떨어진 바늘로 인해 그 이불을 덮고 자는 이들에 대한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터무니없는 공포는 무안해 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시의 내면을 볼 수 있어 시인에게 좀 더 다가간 기분이었다.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반복적인 드러남도 있었지만, 반복적인 드러남이라 하더라도 온전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었다. 새, 나비, 욕조 등 익숙한 소재에 시인이 실어준 메시지는 가볍지 않았다. 거기에 시집의 제목인 '시차'는 다양한 모습으로 시를 통해 독자와 시인을 연결시켜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제대로 들어가기란 내게 무리였다. 내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종종 나를 사로잡는 시의 드러남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모래의 순장>에서 '다른 것들의 몸을 빌려 자신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만 년 전부터 떠돌고 있는 자신의 무덤을 찾기 위해'란 구절을 통해 흔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시만 짜서 이대로 생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이 비단 시인만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시인을 비롯한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고뇌이고, 번민이기에 그의 시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바탕을 같은 셈이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온 몸으로 세계를 느끼며, 표현이 다를 뿐이라는 것. 시야가 좁아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내게, 시인은 온 세상을 훑고 지나가는 시를 들려주었다. 세상의 모든 언어와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몰이해보다, '시차'의 피로함을 핑계 대며 떨쳐내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