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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반짝 Jan 27. 2022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 알기 위해선/세모난 구멍이

김지녀 <시소의 감정>


 시집의 제목이 풍기는 느낌이 너무 신선했다. <시소의 감정>이라는 다소 낯선 제목을 싱그럽게 해 준 것은 초록색과 함께 한 겉표지의 디자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시집과의 대면을 앞두면서 시가 참 맛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를 맛있게 읽는 방법은 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고, 주변의 분위기를 맞춰 주는 것이다. 거기다 이왕이면 소리를 내서 읽으라는 많은 분들의 충고를 따른다면, 내가 이 시집과 대면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온전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읽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나의 시 읽기는 부끄러움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권의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느끼는 경이로움이 시인에게는 더 가중된다는 것이다. 한 편의 시를 꾹꾹 눌러 쓰고,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내는 그들의 노고가 어떠한지 시를 읽어보면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런 시를 마주한 독자는 그 시들을 읽는 태도가 어떠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그 노고를 들춰내기 민망할 정도로 스르륵 읽어가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시를 음미하거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내게는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 그렇게 무작정 읽어내려 가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부끄러워 시집을 덮어 버릴 때가 많다. 이렇게 읽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한 권의 시집을 읽어 내는 것은 아주 단시간이거나 장시간일 때 두 상황뿐이다. 김지녀의 첫 시집을 읽는 것은 후자에 속했고, 부끄러움을 벗겨냈을 때 진정한 시 읽기가 되었노라 고백하는 바이다. 


  <시소의 감정>에 실린 시들을 맛있게 읽은 것은 중간부터였다. 시집을 한두 편씩 읽으며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다, 시를 온전히 느끼고 싶은 갈망이 일어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확실히 소리 내어 읽을 때는 목이 좀 아프고 갈증이 나긴 하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읽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맛이 났다. 똑같은 시 임에도 소리를 내어 읽을 때는 시어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와 닿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시어에 소리가 닿지 못했을 때의 존재감 상실이, 소리를 덧입혔을 때 이렇게 생생하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종종 소리 내어 읽는 시의 매력을 느끼긴 했지만, 시가 지난하게 다가올 때 소리를 입혀보니 현격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나간 시들을 다시 들춰서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다가오는 시들 또한 그렇게 읽다 보니 시가 참 맛깔나게 느껴졌다. 


  김지녀의 첫 시집인 만큼, 내게도 낯선 시인이었다. 그러나 낯설다는 느낌에서 오는 생경함이 아닌, 그녀의 시 자체는 무척 독특했다. 정갈한 느낌이 든다고는 할 수 없지만, 톡톡 튀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들이 많았다. 처음 그녀의 시를 읽어갈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아 적이 당황스러웠다. 시를 읽기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그 안의 메시지와 함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리를 내어 읽으니 내가 지나쳤던 느낌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시인만의 독특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 시인마다 시가 모두 다른 색깔을 내는 것은 당연할지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발견하고 독자에게 인식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해주는 시의 나열이었다.  


  그녀의 시에는 나의 생뚱맞은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만족시켜 주는 시들이 많았다. 종종 오래된 나무들을 보면서 저 나무는 몇 백 년의 세월을 하면서,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일깨우듯 <천 년 동안, 그늘>이란 시에서 '당신들은/천 년의 나무를 보고/사진을 찍고/싸움을 하고/시간의 구멍/그것을 메운 시멘트에 대해 얘기하지' 라며 나의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천년을 살아온 나무의 생각을 통해 나무의 삶과 인간을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였다. 또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직접제시보다 비유를 통해 내면을 노래하는 시들도 많았다.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 알기 위해선/세모난 구멍이 필요해' 라고 표현하면 수박을 상상하듯이, 수박의 내면과 수박이 맞이하는 여름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교만하고 완고한 뒤통수>에서는 한 낮과 한 밤을 재미나게 표현한 것 또한 그랬다. '내가 눈 뜰 때 너는 눈 감는다//한 낮이 한 밤에게 돌아서서//(중략) 한 세계가/벽 쪽으로 돌아눕는다'라고 노래한 시를 만나면 자연스레 낮과 밤을 떠올리고, 상상의 언저리에 남겨진 생각들을 시인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저자만의 이런 독특한 시의 세계는 소리를 내어 시를 읽고 음미했을 때 발견 한 것들이었다. 그랬기에 소리의 유무가 시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의 존재가 어떻게 달라지는 것인지 확연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작품 해설을 해 주신 서동욱 교수는 '일상 속의 평범한 사물을 선택해, 기성의 어떤 의미나 이론이나 은유 또는 상징에 매개되는 일을 피하면서 그 사물 자체에 몰두하는 것은 김지녀 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라고 했다.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 속의 사물을 파악해 명쾌하게 특징을 잡아 주고 있어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한 권의 시집을 만나고, 한 편의 시를 읽고, 한 사람의 시인을 알아간다는 것은 이토록 나날이 다른 매력을 안겨 주고 있으니, 시에 대한 무지를 들고서라도 멀리 할 수 없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이런 만남이 끊이지 않고 내게 찾아와 주길 바라며, 시의 세계에 대한 탐험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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