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드리스 엑스타인스 <봄의 제전>
팬데믹임에도 봄은 왔다. 설렘 가득한 벚꽃 잎은 이미 다 떨어졌지만 연두 빛 나뭇잎은 한껏 봄을 뽐내는 중이다. 사계절 중에 봄은 가장 화려하고 생명력을 터트리는 점에서 축제와 연결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였을까?『봄의 제전』이라는 제목을 단순하게 계절과 연결했고 무희들 뒤로 흑백의 군사들이 드러난 표지를 보고 나서야 이 책의 정체를 전혀 추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다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의 부제라니. 전쟁에 대한 편견을 깨야 하는 것인지, 전쟁의 또 다른 이면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전쟁이라는 게 상대 의지를 강제해서 뭔가 득을 취하려는 건데 미래를 파괴하면서 얻어서 뭐하게?
「멜로가 체질」중에서
나에게 전쟁은 드라마 대사와 비슷하다. ‘득’을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끊고 ‘미래를 파괴’하면서까지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쟁은 오랜 역사를 가졌고, 무려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분명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독일이 우리 세기의 뛰어난 모더니즘 국가였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며 ‘문화는 사회 현상으로, 모더니즘은 우리 시대의 주요 충동으로 간주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이라는 두 표현 사이에 단순한 군사적 어원을 넘어서는 친연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고 밝힌다. 그러므로 1,2차 세계대전의 중심에 있는 ‘뛰어난 모더니즘 국가’ 독일의 진정한 모더니즘을 발견해 내는 것이 독자에게 주어진 임무일지도 모른다.
「봄의 제전」은 음악 무용 작품이다. 이는 이교도 러시아를 나타내며, 음악과 무용은 거대하게 밀려드는 봄의 창조력과 신비라는 한 가지 아이디어로 통합된다. 이 작품에는 플롯이 없다. 29쪽
이 책의 제목은 1차 세계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 5월에 초연된「봄의 제전」에서 따왔다. ‘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하다가 궁극의 파괴력을 얻게 된, 원심적이고 역설적인 우리 세계 최고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허무주의적 광란의 아이러니가 담긴 죽음의 춤’이라는 말에서 제목의 의도를 단박에 파악했다. 전쟁은 ‘플롯’이 없고 지금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모르면서도 모든 것을 던진 ‘광란’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파격적이고 도발적인「봄의 제전」의 첫 공연에서 관객의 평이 갈리고 전혀 다른 비평이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논란거리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논란의 중심에 서서 ‘현대 예술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이 파격적인 공연을 제작하며 러시아 예술의 길목을 열어 준 댜길레프는 ‘예술을 구원과 재생의 수단으로 인식’했으며, ‘서구 문명의 경쟁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윤리에 지배되는 우선적 가치들로부터의 해방’의 자유를 추구했다. ‘희생양은 애도되는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 기려졌다.’는「봄의 제전」은 ‘도덕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로 전쟁과 닮아 있다.
20세기에 들어선 뒤, 독일은 다른 나라와 민족에 대한 공격적 태도로 일관하며 자국의 맹방이나 중립국, 적대국가의 불안이나 소망, 이해관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51쪽
이미「봄의 제전」에서 플롯이 없는 플롯을 가져온 저자는 이 모든 걸 철저히 자료에 의해 증명하듯 분석한다. 공연의 순서를 따라가듯 전쟁의 허무함과 때론 또렷한 목적의식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유럽 내전, 유럽 정신 내부의 보이지 않는 적에 맞서는 전쟁’ 이야기를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해 풀어낸다. 익히 알고 있는 정치인들도 등장하지만 전쟁에 직접 뛰어든 일반 병사들의 편지, 전쟁 중에도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파티에서의 대화, 그 당시의 문학작품과 음악, 심지어 패션의 변화에서도 전쟁의 이미지를 채워나간다. ‘전쟁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아이러니를 이렇게 광범위하게 다루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그 사람들의 인생 하나하나에 들어가 전쟁을 각각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녹여내고 있었다. 1914년 프랑스와 영국, 독일에서 전쟁에 나간 사람들은 주로 봉사와 의무 관념으로 충만한 중간계급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지위가 높든 일반 병사든 그들의 시선에서 본 전쟁은 입체적으로 그려지기보다 평면적인 느낌을 받았다.
1914년의 전쟁은 4년 동안 이어지면서 다양하게 변해간다. 병사들은 ‘봉사와 의무 관념’으로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초기에는 전쟁의 참상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설사 의미가 명확하더라도 계속되는 전쟁 앞에서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처럼 여겨졌을 것 같다. 그래서 서부전선에서는 적군과 섞여 친목활동을 하고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데 사회는 유감스럽지만 전쟁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은 영토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둘러싼 것’이라며 독일의 이기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전쟁의 성격이 변해감에 따라 적은 갈수록 추상적 관념이’ 되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쟁의 모더니즘은 태어나고 있었다. 베르됭에서 포스겐 공격을 하면서 병사들은 방독면을 쓰게 된다. 지금이야 방독면을 쓴 모습 자체가 낯설지 않지만 ‘가스는 전쟁을 초현실의 영역, 환상의 영역으로 가져다 놓’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방독면을 쓰는 순간 병사들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표식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전쟁의 영역에서 이것만큼 아방가르드한 것이 있을까? 병사들이 끔직한 참호전에 지쳐 병들어 가고 있을 때, 전쟁의 목적도 알려주지 않으며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거대한 벽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슬프고 비극적인 혁신은 없을 것이다.
독일의 전적인 전쟁 핵심은 낡은 구조의 전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역사학계의 시선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외부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 속에서 찾으려는 독일의 경향에 주요하게 일조’ 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또 역사는 분석보다는 직관의 문제라고 주장하는데, 독일의 직관은 알다시피 ‘관념, 영감, 수단으로서’ 전쟁이 찬미되고 만다. 전쟁을 통해 해방감을 느꼈던 것일까?「봄의 제전」속 희생 장면의 대규모 재연이라고 말한 것처럼 전쟁의 희생자들은 ‘영예롭게 기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전쟁의 실존적 의미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희생자들은 죽음을 강요당하고, 오히려 영예로운 죽음이 살아 있는 현재보다 더 의미 있다는 뉘앙스를 서슴없이 드러낸다.「봄의 제전」이 음악 무용 작품인 것처럼 ‘전쟁의 광경과 소리를 예술과 연결하는’ 시도도 있었다. 전쟁터의 소리와 병사들의 몸짓은 ‘도발을 목적으로 삼는 예술, 이벤트이자 경험이 되는 예술’로 작용되고 있었다.
인간은 구속에서 풀려나왔다. (…) 자유는 개인적인 문제,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가 됐다. 448쪽
수많은 희생과 파괴,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결국 전쟁은 ‘무의식의 영역, 더 정확히는 의식으로 억압된 것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전쟁이 끝난 뒤 1927년 ‘몰락의 고통을 겪는 세계와 새롭게 부상하는 세계 둘 다를 만족시켰’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린드버그의 등장에 열광했다. 전쟁을 경험한 이들과 전쟁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이들을 새로운 흥분으로 연결해준 것의 등장이었다. 거기다『서부전선 이상없다』의 레마르크의 소설로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급작스레 불러일으키면서 ‘전쟁은 집단적 해석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경험의 문제’로 ‘역사가 아니라 예술의 문제’로 변한다. 즉 ‘예술이 역사보다 더 중요해’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게 전쟁을 ‘곤경의 근원’으로 인식했음에도 ‘정치적 도덕적으로 비독일적’이라는 이유로 히틀러는 레마르크의 책을 불태우고,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나치의 등장은 ‘모더니즘적인 충동인 또 다른 혼성체, 즉 비합리주의와 기술주의가 만난 혼성체의 산물’이 되었다.
나는 삶이 잔인한 투쟁이고 종의 보존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514쪽
히틀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관점을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전쟁터에서 경험한 것으로부터 형성되었다고 했다. 잘못된 신념이 전쟁을 이벤트로 만들고, 개인적 경험에 비춰 제멋대로 해석해버린 오류가 또 다시 비극을 가져왔다. 안타깝게도 많은 독일인들이 1939년의 전쟁을 1914~1918년 투쟁의 피치 못할 연속이라고 확신했다는 사실이 ‘전멸’을 의미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차라리 히틀러의 초점이 민족을 향했더라면 한 끝 차이라도 괜찮은 결과를 만들었을까? ‘신념은 민족을 향했지만 초점은 개인에 맞춰졌다’는 삐뚤어진 생각은 그리스도를 죽인 이는 유대인이며 그러므로 유대인은 적그리스도가 틀림없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죄의식과 자기 결점을 유대인에게 투사했고, 그는 사회적이든 개인적인 측면에서든 실패작인 사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광기에 사로잡힌 그의 마지막 죽음이 비겁할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1945년 어느 독일 유행가의 제목이「끝없는 봄이다」라는 사실 또한 먹먹하다.
새로움은 비난과 갈등, 혹평을 무릅쓰고 시도해야 길이 열린다. 평가는 엇갈릴지라도 그 모든 혼란과 논란, 부산스러움을 즐기는 것도 감당해야할 몫이다. 공연「봄의 제전」“예술은 자유였다”를 온 몸을 던져 드러냈고 새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전쟁도 예술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자유를 갈망한 전쟁을 예술로 통용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에 희생된 시대는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예술의 크나큰 껍데기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개인의 희생은 그 어느 것으로도 복구 될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의 자기희생적인 ‘미래 파괴’라는 점에서 무의미한 ‘제전’도 ‘끝없는 봄’도 멈춰야 한다. 새로움은 전쟁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서 창조되어야 하는 게 가장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