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네마 파라디소
구닥다리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동네 도서관은 붉은 벽돌벽이 어울린다. 날씨가 화창한 봄날, 도서관으로 걸어 들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평일임에도 이미 많은 사람이 도서관을 찾아와 있었다. 서가에는 책들이 즐비했고 한쪽에 마련된 독서실에는 사람들이 제 나름의 공부 중이다.
고양으로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을 찾을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직원에게 물어 회원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제야 이제 새로운 도시의 진짜 시민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도서관 회원 카드 발급은 그런 의식(儀式)이다.
내 고향에도 동네 도서관이 있었다. 어렸을 적 내가 자란 아파트에서 얼마 걷지 않아 갈 수 있는 작은 시립도서관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주말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서재에 있는 책들은 언젠가 다 읽을 수 있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가끔 그 도서관을 그리워질 때가 있다. 지난번 고향에 내려가 찾아가 봤을 때 이미 폐관한 지 오래였다. 대신 공예 전시장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었다. 사라진 도서관의 그 모습이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곳에서 읽었던 소설과 신문, 수필, 그리고 역사서들이 기억이 난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자란 나는 그 책들을 옆에 두고 어른이 된 나를 꿈꿨다.
명작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는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 시칠리아 작은 섬에서 보낸다. 그곳에서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시네마 파라디소라는 마을 유일한 영화관이다. 그는 학교가 끝나면 영화관을 드나들며 꿈을 키웠다. 어른이 되어 돈을 벌기 위해 로마로 떠난 토토는 먼 훗날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다. 30년 만에 마을로 되돌아온 토토는 영화관 시네마 파라디소가 철거되는 장면을 지켜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고향은 어떤 지명이 아니라 어떤 공간으로 기억된다.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에게 고향은 오직 구닥다리 영화관 시네마 파라디소다. 그렇듯 나에게도 그 동네 도서관이 나만의 시네마 파라디소였다.
당시 그저 책을 좋아하던 아이였던 내게 지금의 내가 되돌아간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당시 나에게 세상은 책 속에 있었다. 어른이 되면 서울로 가고, 세계 여행도 하며 책 속의 내용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곧 멋진 어른이라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그 도서관뿐만 아니다. 크면서 이곳저곳 많은 도서관에서 신세를 많이 지었다. 고등학교에는 도서부였다. 내 학창 시절 거의 유일한 동아리 활동이기도 했다. 학교 도서관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학은 서울로 갔다. 대학교 도서관은 웅장했고 온갖 책들을 찾을 수 있었다. 군인 시절에도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부대 내 위치한 작은 방을 도서관처럼 꾸며놓았다. 그래도 어려운 시절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처음으로 취업을 준비한 곳은 어느 군(郡)에 있는 시골 도서관이었다. 사람이 적은 그곳에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번에 새로이 회원으로 등록한 고양 도서관에서는 얼마나 시간을 보내게 될지 궁금하다. 또 어떤 책을 만나게 될까. 내 인생에서 이곳이 몇 번째 도서관인지 세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도서관과도 잘 지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도서관은 나에게 그런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1층에는 어린이 도서관이 먼저 반겨준다. 그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이 아이들에게도 고양 도서관은 아마 나름의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빌 게이츠의 “나를 키운 것은 작은 동네 도서관이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진부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사실이다.
2. 책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가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적어야 할 일이 있다. 문제는 거기에 자주 ‘특기’나 ‘취미’란이 있다는 점이다. 이 질문은 매번 나를 고민에 잠기게 만든다. 예전에는 자랑스레 거기에 독서라고 적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왠지 창피할 때가 있다.
물론 독서를 취미나 특기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책을 좋아해서 그렇게 쓰는 경우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독서는 무난하고 평범한 대답이다. 사실 그래서 바로 그 점 때문에 나의 독서를 자랑하기 부끄럽다.
요새 들어 책읽기가 지금까지 과대평가 받았다는 주장이 많다. 현대 시대는 바쁘고 정신없는 세상이다. 당장 나도 매일매일 새로운 정보와 기술이 쏟아지고 확인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활자화된 정보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책이 인쇄되는 사이에 세상은 변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에 차라리 건설적이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걸 했다면 어땠을지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양말을 판다. 남편은 자주 집을 나갔다가 소설의 진행 시점에는 이미 거의 행방불명 상태다. 그런 그녀에게 책은 일종의 해답지다. 삶에서 마주치고 있는 문제에 따라서 그녀는 책을 사서 읽는다. 아이를 키울 때는 문제 아이 교육론, 그 아이가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가게 되자 법학개론서, 그러다 남편이 중풍과 치매에 걸려 돌아오자 의료 서적들을 펴놓고 읽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약간은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다. 살아가면서 문제가 닥쳤을 때, 혹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쟁점은 대부분 경우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읽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해결의 열쇠인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슬슬 나의 독서는 방향을 틀었다. 순전히 내 취향과 재미를 위해서 읽기 시작했다. 지금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은 ‘실크로드 세계사’이다. 물론 좋은 책이지만, 내 삶과는 저 멀리 떨어진 주제를 다룬다. 중앙아시아의 수천 년 문명사를 읽으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당장 내 눈앞의 근심과 걱정에서 눈 돌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죄책감이 든다. 내가 독서를 잘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독서를 하는 것이 정말 옳을까. 현실주의자가 되지 못한 기분이다. 그래서 독서를 내세울 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 같다.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독서 인구는 계속해서 줄어만 간다. 어느 특정 세대나 성별의 문제 역시 아니라고 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책을 읽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1년에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어느새 전체 국민의 반이 넘는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독서에 실망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책에 있어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독서가 무책임한 취미가 아닌지 의심이 들더라도 금세 머리를 흔들게 된다. 내가 쓰는 글은 사실 모두 독후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작가는 편집자다. 새로운 글은 없다. 모든 글은 앞서 있던 글들을 편집하여 새롭게 내놓을 뿐이다. 글쓰기는 사고를 정리하는 작업이기에, 다르게 말하면 내가 하는 독서는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다.
도서관에서 책장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한다. 모두 한국십진분류법을 따르는데, 내가 좋아하는 번호는 100번(철학), 300번(사회과학), 800번(문학), 900번(역사)이다. 하지만 가끔은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소풍하듯이 다른 분야의 책들을 살펴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200번(종교)과 400번(자연과학)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책을 만나기도 했다.
어쩌면 이렇듯 내가 주로 살펴보는 분야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 역시 도서관의 가치일지도 모른다. 지적 습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
이런 다양한 책들이 모두 어떻게 구체적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모두 제 나름의 대가들이 남겼던 정신노동의 흔적이고 내 사고를 그 너머로 데려다줄 것을 안다. 그렇기에 이 역시 뻔한 말이지만, 책이 해답이 될 수는 없어도 좋은 질문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3. 고양작가코너
고양 도서관에는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자그마치 ‘고양작가코너’다. 분위기 있게 꾸민 공간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정면에서 마주 보게 되어있다. 아마 도서관에서도 힘을 꽤 힘을 준 모양이다.
한번 둘러보니 이름을 아는 유명 작가도 있다. 소설가, 수필가, 시인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고양에서 살았던 작가들의 모음이라고 하니, 어쩌면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책들이 서로도 몰랐던 인연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다. 마치 이제는 다른 삶을 살게 되다가 우연찮게 모인 동창회 같은 인상을 준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식의 진열을 본 적이 없어 새롭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고양이란 도시가 가진 나름의 힘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어쨌든 글을 쓰기 좋은 동네는 아무래도 살기 좋은 동네일 것이다. 내 편견일 수 있겠지만.
도서관은 지역사회의 기반 중 하나다. 책이 번쩍번쩍 빛나는 지역사회 홍보나 멋진 인프라 프로젝트가 되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역과 책 사이의 관계가 주민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것은 분명하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지금 내가 살게 된 고양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언젠가 저 고양작가코너라는 명예의 전당에 내 이름이 올라갈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다. 고양에 살기 이전까지 나는 이렇게 글을 열심히 쓰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다. 정말 어쩌면 고양이란 동네에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매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