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제가 대입 10주년을 맞은 해입니다. 그리고 학계에 남기로 결정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학업과 연구를 하며 오랫동안 해온 생각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이 글에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고에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한국의 입시는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도구처럼 쓰이고 있다. 고작 인구의 몇 퍼센트 채 되지도 않는 상류층을 위해 국가의 시스템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지도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심해졌다. 초등학생 때 고교 과정을 끝내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2025년부터 의대 입학 정원이 확대될 것이라고 결정되자 학원가에는 초등 의대 준비반 입학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초등 의대반 수업을 참관한 서울대 의대생들의 반응을 촬영한 콘텐츠가 업로드되어 있다. 의대생이 강력하게 추천하는 초등에서 준비해야 할 4가지라는 제목을 한 콘텐츠도 있다.
우리의 인지 도식은 왜곡되고 경직된 입시 문화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지 도식이라는 게 쉽게 바뀌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입시에 절여졌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까? 인지 치료(cognitive therapy)에서는 개인의 경직된 인지 도식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있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흔히들 ABC 기법이라 불리는 것을 많이 쓴다. A는 선행 사건(Antecedents), B는 신념(Beliefs), C는 신념을 통해 사건을 해석한 결과(Consequences)로 나타난 행동과 감정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한국의 입시 제도와 문화 속에서의 ABC를 모두 살펴보았다. 여러 경로로 주입되는 대입 신화는 선행 사건(A)이고, 그 신화가 옳고, 바람직하며,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은 경직된 신념(B)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사회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고, 대화하고 토론하지 않게 되며, 자신의 주장만이 정답이라고 여기게 되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항하지 않으면서 양극화의 구조에 희생자로 전락하는 결과(C)를 맞게 된다. 이 ABC는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서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직면해야 한다. 생각을 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옳지 않은 것인 것 제대로 봐야 한다. 구조와 체계 너머의 이데올로기를 직시하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 문제 사건을 직면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누구나 문제를 피하고 싶어 한다. 죽은 물고기가 되어 물결을 따라 흐르는 것은 참으로 편한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경직된 신념과 믿음이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들을 요목조목 따져봐야 한다. 극단적인 경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쪽은 언제나 대다수의 시민이다. 소수의 기득권 계층은 지금도 괴물이 된 입시 제도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다. 그 미소는 나에게 보이는 호감의 표시가 아니다. 서로 잘 지내보자고 인사를 건네는 표정도 아니다. 횡단보도의 끝에서 우리들을 마주 보며 다가오는 괴물의 음흉한 표정을 우리는 미소로 착각하며 늪을 향해 스스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당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인지 치료의 ABC 기법의 핵심은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나의 신념으로 해석한 사건의 결과가 정말로 근거에 의한 합리적인 것인가? 저 사람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정말 나를 보고 비웃은 것인가? 지금 들리는 쾅! 소리가 정말로 테러에 의한 폭발음인가? 대학에 입학하면 양질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가? 양질의 일자리를 가지면 나는 행복한가? 입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지만 우리는 왜 이 짓을 당장에 멈추지 못하는가? 학원에 왜 가야 하는가? 학원에 가면 성적이 정말로 오르는가?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능 성적은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와 향후 학업 수행 능력을 정말로 타당하게 예측하는가? 돈을 추가로 더 들이면 정말 잼버리 사태가 해결이 될까? 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나는 믿는가? 성소수자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괜히 불편한 감정이 드는데 이 감정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성소수자는 정말 우리 사회에 에이즈를 퍼뜨리는가? 여성이 꼭 남성을 좋아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가 타당한가? MBTI로 개인의 사회성과 업무 수행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가? INFP는 정말로 회사의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성격 유형인가? 나는 왜 특정 MBTI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계기로?
마땅한 근거가 없다면 나의 믿음과 신념은 기각된다. 무지막지하게 불편한 일이고 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겠지만 근거를 찾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래야 유연한 인지 도식을 지닐 수 있다. 어떠한 정보와 사건이 투입되어도 그것을 제대로 보고,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의 뒤에 숨은 구조까지 읽을 수 있는 그러한 유연한 인지 도식을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입시 제도로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현행 입시 제도는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는 내게 남은 숙제다. 나는 지난해 학계에 남기로 결정했다. 내 삶의 아주 큰 결정이다. 앞으로 나에게도 누군가를 가르쳐야 할 기회와 역할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쨌든 시험과 과제를 내고, 채점을 하고, 성적을 매겨야만 할 텐데. 이 모든 걸 어떻게 풀어가야 ‘교육’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후배 학생들이 고된 입시를 견뎌 최종의 단계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앞으로는 내가 될 것이다. 최종 빌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교육자가 되기를 바란다.
<대학입시, 우리 모두가 피해자다>를 마무리합니다.
hiphopstep.
참고문헌
서혜림. (2023. 10. 16). 의대정원 확대에 ‘초등 의대반’ 문의 쇄도…”초3때 고교수학도”.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3101613420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