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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Mar 31. 2024

막걸리는 무엇을 알려줬을까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FAQ)

감독: 김다민

2024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64548519edfd6bc2609c892c53362b35252ed438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를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81ddcafbdc37dada835bc145d7cce1c79fcd9bee

어릴 적 부모님과의 추억을 딱 하나만 기억해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버지와 밤새 가족신문을 만들었을 때를 꼽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와 커다란 전지에 종이를 오리고 붙여가며 가족신문을 만들었다. 그 신문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어떤 디자인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늦게 작은 방에서 커다란 전지를 아버지와 함께 꾸몄던 것. 서로 많이 웃었던 것. 그리고 그때 만든 가족신문이 우수상을 받아 학교 복도에 크게 걸린 것. 칭찬을 많이 받은 것. 그런 것들이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오은영 박사는 MBC 예능 <라디오스타>에서 출연진들에게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수학 시험 점수를 말해보라고 했는데 그 시험 점수를 정확히 기억해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시험을 앞두고 눈을 비비고 허벅지를 찔러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더니 그때는 모든 출연진들이 그랬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오은영 박사는 점수보다는 공부했던 과정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네가 중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가족신문을 만들었던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고, 나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1caeb5cddbab0a739bba3b83058d023ce1540887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의 영어 제목이 FAQ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FAQ는 Frequently Asked Questions의 줄임말이며, 자주 묻는 질문이라는 뜻이다. 제목을 통해 우리는 평소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어떠한 답을 막걸리가 알려주는 식으로 줄거리가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동춘은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왜 숙제를 해야 하는지, 왜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학원 선생님에게도, 엄마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묻는다. 그러나 어른들은 명쾌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동춘은 무기력해진다.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동춘이 기절을 하고 나서야 앞으로의 말하기 대회에 나갈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주 조금이나마 주어졌을 뿐이다. 페르시아어 학원을 다녀야 하는 것,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 영재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하는 것 등등 일상의 거의 모든 것에서 동춘의 선택권은 없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a95cc2cd662318f17914614de0554fc9191b4753

대체 왜 학원을 다녀야 할까? 왜 선행학습을 해야 할까? 이는 우리 사회에 십 수년 전부터 던져진 FAQ이지만, 아무도 제대로 대답한 사람이 없다. 문제의식을 어렴풋이 공유하고는 있지만 변화를 위해 제대로 나서서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옌센의 저서 <가짜노동>에는 '아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아는 데 모르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너무 오랫동안 어떠한 문화에 우리의 의식이 푹 절여져서 의도적으로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알고는 있음에도 그것을 인식하기가 어려운 상태에 놓이는 것이 가능하다. 지나친 사교육과 대입 경쟁이 어린 학생들의 창의력과 호기심을 말살시키고, 수면을 박탈하며, 스트레스를 증폭시키고,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망가뜨리며, 자아존중감을 짓밟고, 결국 자아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로 성인이 되어 사회로 진출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를 위해 아무 노력도 기울이고 있지 않다.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505616aa39ba6366294d8eef50da2065bb1c283e

동춘의 엄마는 동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는 것이라고. 우선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려면 두 사람이 각자의 다리 한쪽을 서로의 다리에 묶어야 한다. 원래 다리가 네 개인 두 사람이 다리가 세 개인 한 사람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서로 분리된 채로 각자의 두 다리로 달리기를 하면 더 안전하고, 더 빠르고, 더 자유롭게 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춘의 엄마는 딸과의 융합을 선택했다. 가족심리학에서 가족 구성원 간의 융합은 정서적 융합을 의미한다. 정서적 융합 상태에서는 나와 상대를 분리하지 못한다. 두 몸이 하나의 몸이고, 두 의식이 하나의 의식이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자신과 분리된 상대의 고유한 삶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상대의 삶에 사사건건 간섭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동춘의 엄마는 동춘의 성공을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의 잣대를 동춘에게 들이민다.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는 동춘과 엄마는 한쪽이 넘어지면 모두가 쓰러지는 위태로운 레이스를 펼치게 된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8c0770dd8b6c3e5a8453c7bca832a7b432007bde

아무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답.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에서는 막걸리가 동춘에게 말을 건넨다. 이게 말인지 막걸리인지 싶은 기가 막힌 창의적 세계로 영화는 우리를 초대한다. FAQ. 자주 묻는 질문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이제껏 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답이 있기는 있을까? 동춘은 그 답을 구하러 모험을 떠난다. 스스로 묻고, 생각하고, 대답하는 모험. 막걸리는 동춘에게 무엇을 알려줬을까? 


hiphopst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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