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힙합스텝 Jul 24. 2023

중경삼림, 신뢰가 부재한 도시 (4)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구강기 고착의 관점에서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重慶森林)

감독: 왕가위

1994년 개봉 (홍콩)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중경삼림>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7033


영화 <중경삼림>을 심리학의 이론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1부의 금성무와 임청하 사이의 경로 (path)가 지극히 우연한 사건에 의해 그려졌다면, 2부의 양조위와 왕페이의 경로는 무섭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왕페이의 계획에 의해 그려진다. 금성무와 임청하가 신뢰가 부재한 사회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방법 자체를 잘 모르는 쪽이라면, 왕페이는 관계 형성에 있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쪽에 가깝다. 양조위는 관계 단절과 거절의 두려움 때문에 상황을 회피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는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므로 늘 소통에 문제가 있다.


왕페이는 대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사실상 범죄 행위다. 양조위의 전 여자친구가 두고 간 편지를 멋대로 읽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이미 그녀는 신뢰를 잃는다. 그러니까 양조위와 왕페이의 관계는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무너진 신뢰 위에 쌓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양조위는 여자친구가 떠났다는 사실에 힘겨워하고 그녀가 남긴 편지를 읽으려는 의지가 아예 없는 것처럼 군다.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고 양조위의 집 열쇠까지 손에 넣은 왕페이는 정보의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이별로 인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양조위의 심리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중경삼림>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7033


양조위가 없는 양조위의 집에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왕페이는 왕래로만 그치지 않고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영화 중간에 왕페이의 몽유병이 언급되며 그 행위가 과연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왕페이의 꿈에서 일어난 일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 속에 묘사된 왕페이의 행동은 기이하다. 이는 마치 현장에 자신의 표식을 일부러 남기는 범죄자의 행동과 유사하다. 실제로 왕페이의 무단 주거 침입 행위는 충동적이기보다 계획적인 것이 맞다. 그녀는 양조위의 집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일에 심취하여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거짓말을 한다. 또 식당에서 밥을 먹는 양조위에게 다 먹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냐고 묻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식사를 마치기 전에 그의 집에 다녀오기 위한 그녀의 고의적인 질문이다.


왕페이의 이상 행동에 양조위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왕페이는 이러한 양조위를 두고 속으로 웃는다. 우리는 왕페이 같은 사람들이 짠 판에서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회피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부딪혀야 하며 주변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그러나 <중경삼림>의 양조위는 그게 안 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중경삼림>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7033


사실 양조위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이미 인물 간의 명확한 의사소통은 물 건너갔음이 선언된다. 바로 왕페이가 크게 틀어놓은 음악 소리 때문이다. Mamas & Papas가 부른 California Dreaming이 아주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조위와 왕페이는 적절히 소통할 수 없다. 한글 자막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자막 없이 한국어 음성으로 들어야 했다면 대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양조위는 음악 소리를 낮추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5부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중경삼림, 신뢰가 부재한 도시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