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기름처럼 섞인 할리우드 하이틴과 한국
엑스오, 키티 (XO, Kitty)
2023년 넷플릭스 공개
커버 이미지 출처: Netflix Tudum XO, Kitty. https://www.netflix.com/tudum/xo-kitty/episodes#EpisodeGuide.81495853
넷플릭스 시리즈 <엑스오, 키티>를 리뷰한 글입니다.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만약 <엑스오, 키티> 제작진이 K-드라마를 풍자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면 대성공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정과 서사가 이렇게 성의가 없을 수가 없다. 여느 하이틴 드라마의 서사 공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 클리셰 자체를 즐기려고 하이틴 장르를 시청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연인과 갈등을 빚고, 결국에는 사랑의 결실을 맺어, 프롬 파티를 향해 달려가는 서사는 매번 똑같으면서도 묘한 만족감을 준다. 매력적인 청춘스타들의 풋풋한 사랑과 낭만은 언제 봐도 귀엽고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엑스오, 키티>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하이틴 서사를 한국의 배경에다가 씌운 시리즈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꼭 한국 드라마의 전형성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었다. 권위주의적이고 가족에게 무관심한 부모. 직원에게 배추를 날리며 갑질을 하는 회사 대표. 부잣집과 가난한 집 자녀 사이의 관계. 규칙에 엄격하고 학업만을 강조하는 선생님. 그리고 인물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이 없으면 결코 굴러갈 수 없는 서사. 이 모든 것이 <엑스오, 키티>에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친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위장 연애를 한다는 설정까지는 좋았다. 그 비밀이라는 것도 공중파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설정이니 꽤나 괜찮은 전개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가난한 주인공의 생계와 등록금을 걸고넘어지며 계약서에 기반한 위장 연애가 폭력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이다. 하이틴 로맨스가 아무리 가볍게 즐기는 장르라지만, 그것이 서사까지 성의 없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엑스오, 키티>는 인물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방식이 매우 성의가 없었고, 허술했으며, 시대착오적이었다. 2009년 방영한 <꽃보다 남자>나 2013년 <상속자들>에서나 보았을 법한 서사의 문법이 2023년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의 스핀오프 기대작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한국의 이곳저곳이 예쁜 모습으로 화면에 잘 담긴 것은 사실이다. 해외 시청자들도 시리즈에 등장한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에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배경으로 한 장면은 미래적이면서도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할리우드 콘텐츠가 한국의 배경을 보여주고 케이팝을 들려준다고 해서 우리가 손뼉 치며 신기해할 시기는 이제 지났다.
또한, 배경이 되는 사회의 문화를 콘텐츠가 있는 모습 그대로 잘 반영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반대로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그 사회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시청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엑스오, 키티>는 이미 한물 간 K-드라마의 요소들을 성의 없이 차용하여 기존 한국 드라마의 신파적인 서사의 한계를 해외 시청자들의 뇌리에 더욱 강하게 각인해 버렸다. 학생들 개인의 사랑과 갈등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그 갈등의 시발점에 재벌 가족의 계략과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한국의 아버지상을 반드시 욱여넣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물론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잘 수용되지 않는 사랑의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꼭 여느 한국 드라마나 영화처럼 가족의 갈등으로 굳이 확장시켜야만 했을까?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엑스오, 키티>와 비교해서 좋은 서사로 꼽고 싶은 드라마로는 <우리 연애 시뮬레이션>이 있다. 한국에서 제작한 이 BL 드라마는 여느 한국 드라마와는 다르게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그럴듯한 '한국적인' 외부 요인이 없다. 삼각관계도 없고,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괴롭힘도 없고, 부모의 반대나 가출 그로 인한 좌절도 없다. 심지어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의 시선도 없다. 이 드라마는 그저 두 사람의 관계와 사랑 그리고 내면의 갈등에 집중한다. 쓸데없는 제3의 요인을 깔끔하게 제거하고 러닝타임을 꽉꽉 채워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들만 보여준다. 그에 반해 <엑스오, 키티>는 쓸데없는 장면이 너무 많다. 키티와 대는 본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외부 요인에 의해 계속 겉도는 관계를 맺으며 갈등을 빚는다. 유리의 연애사도 당사자가 아닌 부모들에 의해 결정된다. 게다가 그 외부 요인이라는 것도 너무나도 매력 없는 구닥다리 설정이라 보는 것이 괴롭다.
한국에서 제작한 드라마가 아니라서 어설플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그런 식이라면 앞으로 한국은 순수 한국 콘텐츠만 만들어야 하고, 미국은 순수 미국 콘텐츠만 만들어야 한다. 능력 있는 제작진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금만 논의하면 완성도 높고, 어색하지 않은, 양질의 콘텐츠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엑스오, 키티>는 그저 과거의 것을 답습했을 뿐 서사에 있어 그 어떠한 성의도 찾아볼 수 없다. 비현실과 현실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과장되어 가공된 한국의 모습이 할리우드의 하이틴 장르와 물과 기름처럼 섞여있는 모양새다.
<엑스오, 키티>는 인기리에 넷플릭스에스 스트리밍되고 있고, 이미 시즌 2 제작이 확정되었다. 시즌 1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아무래도 민호를 연기한 배우 이상헌이다. 적당히 가벼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부잣집 도련님의 배역과 배우의 이미지가 잘 부합했고 연기도 안정적이었다. 주인공 키티와의 케미스트리도 키티의 남자친구인 대보다 훨씬 좋았다. 시즌 2에서는 아무래도 민호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왕 시즌 2 제작이 확정되었으니, 다음 시즌은 구태여 끌고 들어올 필요가 없는 K-설정들을 과감하게 삭제했으면 한다. 키티 엄마와의 연결고리가 있는 김윤진 배우의 역할 정도를 빼고는 분량을 모두 줄여야 한다. 유리의 아빠, 대의 동생의 밑창이 다 해진 신발,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대, 회사의 직원들과의 회의 장면, 기자회견, 인턴십 프로그램 기타 등등. 다음 시즌에서는 다 내려놓기를 부디 바라며.
hiphops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