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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희 Dec 21. 2022

아들아, 아버지의 세계를 부수어라

만 17살 소년에게

부친 살해, 아버지 죽이기. 듣기만 해도 자극적이고 괜히 죄를 짓는 것만 같은 기분. 아버지 죽이기. 소년, 아들의 세계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우리 반 스물네 명의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그림자는 짙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재미있다, 그 짙은 그림자, 아버지의 세계를 부수겠다는 욕망은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가지고 있다. 아들들은 꽤나 강하고 도전적이다.


"얘들아, 너희는 나중에 결혼할 여자 친구를 부모님께 보여드렸을 때 부모님이 반대하시면 어떻게 할 거니? 아버지의 말을 듣는 아들이 될 거니, 아니면 아버지를 이겨먹는 아들이 될 거니?"


"당연히 아버지를 이겨먹어야죠."


만 17살 소년들은 제법 남자답다.


아버지 죽이기. 서사에서 늘 반복되어 왔던 이야기이다, 어린 날 예쁜 그림체에 반해 책이 너덜해지도록 보아왔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아버지 죽이기는 나타난다, 아버지 죽이기. 기존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것은 혁명이 되기도 한다. 소년은 아버지의 세계를 부수고 아버지로부터의 심리적인 독립이 일어나야지만 진정한 어른, 남자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 남자는 또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아들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 아버지의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진정한 성인으로 성장하고 사회인이 되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아들들은 매 순간 아버지의 세계에 도전한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향한 도전, 어른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관습, 학교의 그 크고 작은 규칙. 아들들은 물음표를 던진다.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 잘못됐잖아요. 질문을 들은 아버지는 왜인지 눈 한쪽을 슬쩍 찡그리곤 혓바닥이 살짝 마르고 쓴 입술을 다신다, 그리고 원래 그런 거니까.라는 조금은 싱거운 대답. 그리고 되바라진 아들이라는 평가가 이어진다.

신화에서부터 반복되는 이 아버지 죽이기는 재미있는 흐름이 있다. 세계의 문학에서 아버지 죽이기는 지겹도록 반복되어 상징적으로 그려지지만, 한국 문학에서는 도리어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는 자식 죽이기가 좀 더 보편적이다. 나는 이게 왜인지 알 것 같다.

언제였을까, 내 기억에서 가장 먼, 그럼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 죽이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그 덜컥하고 내려앉는 듯한 이 기분이 드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얌전하게 살아왔던 자식의 죄책감 같은 거 아니었을까. 우리 아버지는 미장이시다. ‘김미장’이라고 불리는 아버지는 바로 노동자이다. 노동자의 둘째 딸로서 아버지를 죽이고 진정한 어른에 되어라는 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일까, 생각만 해도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입밖에 꺼내는 것조차 망설인다.


문학에서 아버지는 자식을 죽이고 기존의 세계를 공고히 한다. 자식은 아버지 세계의 흡수된다, 그리고 얌전하고 귀여운 자식으로 존재한다. 이 귀여운 아이는 남자가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조금은 죄스러운 일은 아닐까.

사실 나는 용기가 없는 것 같아, 아버지를 죽인 자식은 결국 또 자식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터인데, 자식에게 자리를 내어줄 용기도 부족한 건 아닐까. 사실 나는 조금 못났다.


"얘들아, 너희는 꼭 부모님을 이겨 먹는 아들이 되렴."


"부모님이 배신감 들 거 같은데요."


사실은 나도 그래, 라는 말은 꿀떡 삼켜 버렸다. 아들아, 너는 꼭 너의 세계를 구축하는 어른이 되어라. 그리고 너처럼 예쁜 아들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 할 때 그땐 아름답게 자리를 내어 주어라. 그럼 나도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순종적인 자식이 아닌 홀로 자립하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나 봐.


"너희도 나중에 부모가 될 텐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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