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내가 두려워? "전혀."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만난 친구

by 낭만히피




“와, 이 신발을 신고 눈 덮인 시그나기를 다녀왔단 말이야!?

나는 도대체 상상이 안 간다!! “


테모입니다.

조지아에 도착한 첫날, 잘 곳이 없어 막막했던 저를 집에 데리고 가 잠자리를 마련해 준 커다란 아저씨지요.

이곳에 있는 동안 서너 번 즘 더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우정은 우연함으로 시작해서 두려움을 지나 신뢰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조금씩 친해진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곤 했으니까요.


첫날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테모를 다시 만났습니다.

하지만 어찌하다 히짜뿌리(조지아식 만두)를 사 그의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지요. 텅 빈 집에 둘만 앉아 있던 그때, 다시금 약간의 긴장감이 올라왔습니다. 결국 저는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어요.


- 사실 어제 어떤 사람이 호스텔 앞까지 따라왔어. 아주 나쁜 사람이었지.

나는 여행자의 직감이 있어.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거든.

-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좋은 사람인지?

- 아니, 누가 나쁜 사람인지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경우도 있으니까.

근데, 그거 알아?

나 지금 좀 무서워.

- 섹스를 말하는 거야?

- 그래.

- 첫날은 어떻게 우리 집에 올 수 있었어?

내가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그것 때문에 마주친 한국 사람들이 있어서?

- 맞아. 그리고 너를 봤어.

너는 내가 두려워하는 걸 알고 있었고, 아주 많이 배려했지.

그래도 난 거의 자지 못했어.

- 왜? 내가 다시 올까 봐?

- 응. 수도 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했어.


그리고 우리는 좋거나 그렇지 않았던 삶의 지난 시간들을 나누었습니다.


- 여전히 내가 두려워?

- 물론.

너를 믿고 싶어. 하지만 그게 쉽지 않네.

여행을 하며 만났던 남자들 중 많은 사람이

친절과 더불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

- 아마도 다 그래.

네가 날 믿어 주길 바라지만 너의 태도는 아주 옳다고 생각해.

약속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너를 이해해.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는 나를 호스텔에 데려다주며 말했습니다.


- 오랜만에 비즈니스가 아닌 대화를 하니까 피로가 싹 풀린다.

아직도 내가 두려워?

- 물론.

- 언제쯤 내가 두렵지 않을까?

언제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


- 이 여행이 끝날 때쯤.



그리고 시그나기에서 돌아와 다시 테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편하고 말도 잘 통하는 친구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쭈르륵 늘어놓는

저를 보며 그가 말했던 거예요.


“와, 이 신발을 신고 눈 덮인 시그나기를 다녀왔단 말이야!?

나는 도대체 상상이 안 간다!!"


그리고는 당장 신발가게로 차를 돌렸습니다.

그때 저는 겨울을 나기에는 너무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있었거든요.

차는 신발 가게 앞에 도착했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실랑이가 시작됩니다.


- 들어가서 봐라. - 싫다 나는 이 신발이면 충분하다. - 아, 그냥 들어가서 보기나 해라. - 됐다 내가 내일 알아서 사겠다 좀 가자. - 알았다 어차피 내일 살 거니까 지금 들어가서 봐 둬라 제발.


두 고집쟁이가 나란히 앉아서 똑같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마지못해 제가 가게로 들어가 휙 둘러보고는 잽싸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


- 얼마 하더냐. - 모른다. - 20만 원 정도냐. - 아니다, 그 반도 안 된다.


저는 알지도 못한 채 아무 말이나 지껄였고 그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제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작!


- 제발 부탁한다 이걸로 신발을 사라. - (안전벨트를 매며) 싫다, 내 신발은 내가 알아서 한다. - 나 내일 아르메니아로 간다 그다음엔 아들이 있는 독일에 가서 일주일쯤 지내다 올 거다 오늘이 우리 마지막으로 만나는 거다 너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하고 싶다 부탁이다.


못 이겨 돈을 받아 들고 가게에 들어갔다가 금세 돈을 팔랑 거리며 나오는 저를 보고 테모가 웃습니다. 거짓말인 거 다 알겠다는 듯이.


- 어쩜 이럴 수가, 어머나 세상에나 마침, 딱 내 사이즈가 없단다!


어쨌든 이 실랑이의 승자는 저인 거죠!


이제 한 시간 후면 생일을 맞이하는 테모와 맥도널드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아직도 내가 두려워?”

“전혀.”


테모.

불과 5분 전까지도 같은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보고 싶을 거야. 특히 너의 바보 같은 웃음소리가 많이 그리울 거야. 나로 인해 네가 잠시나마 지겨운 비즈니스에서 벗어나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나도 너로 인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어. 그거 알아? 너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고마워.


언젠가 꼭 한번 한국에 와 줄래?

나처럼 더 이상 일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을 때라도.

나도 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널 맞이할게.

지금의 너처럼.

돌아온 숙소에서 점퍼를 벗는데 주머니에서 뭔가 잡힙니다.

아까 수도 없이 그와 나의 손을 오고 가던 돈.

그리고,

파란 볼펜으로 급하게 눌러쓴 신발가게 이름과 주소가 적힌 찢어진 하얀 종이.


이 실랑이의 승자는 너다, 테모.


몇 달 뒤 여행에서 돌아와 메일로 소식을 전했고 곧 답장이 왔습니다.


안녕.

오랜만에 너의 소식을 들으니 기쁘다.

나는 네가 세상 어딘가에서 새로운 여행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것도 좋다. 네가 집에 있고, 다시 일을 즐기고 있다는 것.

나는 잘 지내. 삶은 여전히 가고 있어. 같은 일을 하고 있고.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너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평범하지 않은 친구야.

너와의 만남이 즐거워.

또 연락할게.

사진 공유 안 해?

테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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