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흑해 연안의 바닷마을 바투미
“당신이 소피? 맞아요?”
“네. 내가 소피예요.”
쇼트커트에 큰 눈, 까무잡잡한 피부
당찬 목소리와 표정.
누가 봐도 젊고 매력적인 조지아 여자.
소피에게
소피, 어떻게 지내? 너의 '멋짐'은 여전하지?
내 삶이 모질다고 느낄 때 너를 생각하면 용기 같은 것이 생겨서.
가끔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로 돌아가곤 해.
그때 나는 조지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어.
그런데 마침 중국에서 우연히 만난 토니가
이미 조지아를 거쳐 온 여행자였고 그가 그곳에서 알게 된
친구라며 너의 주소를 주었지.
버스에서 내린 나는 그렇게 무작정 너의 집을 찾아갔던 거야.
그리고 다짜고짜 물은 거지.
“당신이 소피, 맞아요?"
넌 참 아름다웠어. 멋있었고 강해 보였어.
내가 머문 2층의 작은 방과 주방, 거실 밖에 보진 못했지만 집은 제법 컸던 것 같아.
남편과 어린 두 딸, 시어머니 시아버지, 알코올 중독인 남편의 형까지 일곱 식구가 살았지.
큰 소리가 끊이질 않았어.
아이들의 울음소리든 시아버지의 호통 소리든 어머니의 잔소리든 싸움 소리든 말이야.
소피 네가 자리를 비운 잠깐의 시간 동안 큰 아이는 무릎에 난 작은 상처의 피를 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고, 시어머니는 잠이 고파 울고 있는 작은 아이를 재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늘 누워 계시던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의 부탁에 못 이겨 누운 채로 아이의 다친 무릎에 연고를 바르다 말고는 화가 나 연고를 집어던지셨지.
걱정 마. 난 식탁에 앉아 먹던 밥을 계속 먹었어. 눈은 티브이에 고정하고.
개의치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이 울 수도 숟가락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실은 네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아.
그리고 네가 왜 그렇게 단단해 보였는지도 그때 알았던 것 같아.
아이들을 재우고 어머니 아버지도 다 주무시면 우린 부엌 식탁에 앉았지.
조금 정신없는 뮤직비디오 채널을 틀어 놓고 터키식 커피를 마시면서
흥에 겨워 가볍게 머리도 흔들었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었어.
때로는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를테면 한국의 평균 월급 같은.)
주로는 환상적인 이야기였지.
언젠가 우리가 좋아하는 샤룩 칸의 나라 인도를 함께 여행할 이야기.
언젠가 너와 너의 남편이 나의 고향으로 놀러 올 이야기.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
나는 그 이야기들을 ‘바람’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비슷한 일상이 시작됐어.
시아버지가 소리치면 너는 먹던 밥숟가락도 내려놓고 달려가 시아버지의 발에 양말을 신겨드렸고,
어머니는 큰소리로 한참 동안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셨고, 너는 찬물로 엄청난 양의 손빨래를 했고,
시아버지에게 동전 몇 개를 받아 치즈 빵을 사 왔고,
아이들은 울었고, 남편은 술을 마셨고, 작은 싸움들이 있었고,
넌 담담했고 넌 아름다웠고 넌 고고했고 넌 끝내 웃었어.
내가 바라보던 너의 세상과 네가 받아들인 너의 세상은 달랐어.
그래서 넌 웃었고, 그래서 난 너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나 봐.
소피, 사실 너의 집 아니 정확히 너의 시아버지 집에 머무는 내내 너한테 미안했어.
아침이면 느지막이 일어난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저녁이면 조지아 가정식을
내오고 내가 좋아하던 터키식 커피를 꼬박꼬박 하루에 두 잔씩 타 주고.
그나마 내가 준비한 몇 푼 안 되는 돈은 시어머니가 가져가셨고.
난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래서 미안했어, 받기만 해서.
너는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계속 지내라고 했지.
가능한 한 오래 있으라고.
마침내 내가 이제는 떠나야겠다고 했을 때, 딱 하루만 더 있으라고 했잖아.
오늘은 작고 맛있는 생선 튀김을 저녁으로 준비했으니 이것만 먹고 내일 가라고.
그렇게 난 또다시 짐을 풀었어.
그리고 그 날 네가 잔뜩 만든 그 작은 생선 튀김을 배가 터지게 먹으며 알았어.
아, 소피 너도 여행을 하고 있구나.
나는 여행을 하다 너를 만났고 너는 나를 만나 여행을 하는구나.
밤마다 들려주던 나의 여행 이야기가.. 그리고 아마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여행 이야기가.. 어쩌면 너의 마음 한 구석을 시원하게 하겠구나.
나는 너에게 바람 같은 사람이구나.
나는 더 이상 미안하지 않았어,
그리고 다음날 비로소 홀가분하게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올랐지.
소피,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몰라.
어쩌면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바람이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여전히 꿈꾼다.
우리가 밤마다 얘기했던 ‘언젠가’가 언젠가 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