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너무 많이 찍지 마. 좋은 것들은 가슴에 담아.

조지아, 눈부시게 하얀 세상 시그나기

by 낭만히피




호스텔 철창문 너머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두터운 옷깃을 가슴팍에 단단히 여미고 바람에 맞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느덧 처음 조지아에 왔을 때 보다 많이 쌀쌀해진 거지요.


“봐요. 지금 보고 있는 사람들 중 열에 일곱은 일이 없을 거예요. 요즘 조지아가 그렇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연유를 섞은 따뜻한 커피를 타주며 주인장 야곱이 말을 건넸습니다.

하루가 늦게 시작되는 이 호스텔의 고요한 아침 시간을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나누며 보내곤 했지요.

세상 어디를 가나 야기되는 불안에 대해서.




오늘은 ‘시그나기’라는 곳으로 떠나기로 한 날입니다.

큰 배낭은 호스텔에 맡겨두고 며칠 지낼 작은 배낭만 꾸려 동행인 H와 함께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차가 출발할 때까지 시간이 넉넉히 남아 마침 근처에 있는 작은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사는 일이 아무리 고단해도 아침 시장의 활기는 대단하네요.

과일, 고기, 치즈, 빵, 곡식을 파는 가게들 앞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하는 기운 넘치는 소리에

덩달아 신이 납니다.

견과류 파는 집 앞에서 동행하던 H가 자연스럽게 호두를 몇 개 집더니 그중 하나를 저에게 건넸습니다.


“아니, 물어보지도 않고!?”


당황한 제가 의아해 물었더니 H가 피식 웃으며 말합니다.


“원래 이러는 거예요!”


당시 호두 값은 상당히 비쌌고 비록 두어 개라지만 구매할 의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인 허락도 없이 집어 먹는 게 저는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원.래.이.러.는.거. 라는 말도 마뜩잖아 “저는 원래 안 그래요.” 하며 호두를 받지 않았지요.

저도 H가 이해가 안 되지만 H도 제가 별나 보일 수도 있었겠지요.

우리 굳이 다 이해하며 살 필요는 없으니까.

그저 저 사람과 나는 이렇게 다른가보다 하며 시그나기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가는 길 내내 빨갛게 노랗게 물든 단풍의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즘에는 갑자기 하얀 세상이 그림처럼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어제 밤새 눈이 내린 모양입니다.

조지아에서 가장 로맨틱한 마을로 손꼽히는 시그나기에 눈까지 소복이 싸이니 절경이 따로 없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지요.

물론 카메라는 그 아름다움을 다 담아내질 못했지만요.



문득 한국을 떠나기 전 엄마의 인사가 떠오릅니다.


“사진 너무 많이 찍지 마. 좋은 것들은 가슴에 담아. 그거면 돼.”


워낙 작은 동네라 숙소가 몇 개 안됩니다.

골목에서 만난 아담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가니 주인장이 따뜻한 빵과 차차로 맞이합니다.

차차는 60도가 넘는 독주입니다. 이것을 마시기 전에는 숨을 한 번 크게 “후” 하고 내뱉습니다.

그리고는 한 번에 들이켜 넘기고 달달한 안주를 하나 먹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영하의 추위에 맞설 준비도 하고, 하루 종일 추위를 견딘 보상도 하는 겁니다.

주인은 멈추지 않고 살얼음이 껴있는 포도도 즉석에서 따주고 따뜻한 커피와 야채수프까지 내오며

크게 환영해 줍니다.



시그나기는 와인으로 굉장히 유명한 마을인데 그 명성에 걸맞게 포도가 차고 넘칩니다.

동네 여기저기 포도가 열려있는 것을 물론 이거니와 벽을 타고 포도가 넝쿨져 있기도 합니다.

눈이 와서 포도 알알이 살얼음이 낀 걸 보니 달달한 맛이 말도 못 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지요. 떨어진 포도들이 길바닥에도 많이 있어

‘발에 채게 많다.’라는 말을 여기서 실감할 정도입니다.




감은 또 얼마나 많던지요. 집집마다 있는 감나무에 몇 개씩 덩어리째로 열려 있습니다.

와, 참 많기도 하다 하며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집주인 어르신이 나와 묻습니다.


“감을 원하나?”

“네. 원합니다.”


냉큼 말했습니다. 한두 개 따주실 줄 알았던 어르신은 감을 잔뜩 따 커다란 봉지에 한가득 담아 주십니다.

거기에 집에서 직접 담근 화이트 와인과 레드와인 역시 한통씩 챙겨 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곤 말씀하셨지요.


“이것이 조지아입니다.”



감나무 밑에서 아무리 입 벌리고 있는 들 절로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꼭 맞는 말만은 아닌가 봅니다.

거저 받는 것.

그런 곳이 조지아인 것 같기도 하고, 여행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삶인 것 같기도 하고.


생이란 것은 거저 주어진 것.

맛있게 먹으면 될 뿐이겠지요.

달면 단대로, 쓰면 숨 한번 훅 내뱉고.


겨울의 시그나기라 동네에 관광객이라고는 나와 H뿐인데 여행 안내소 문은 열려있네요.

차근차근 동네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 어느 때 보다 조용한 수도원을 돌아다녔습니다.

동네를 다니며 만나는 모든 것들이 하얗고 고요한데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만 납니다.



며칠을 보내고 떠나려니 하얀 눈도 다 녹아 마을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얀 시간을 선물해 준 시그나기, 고맙습니다.

좋은 것들 마음에 잘 담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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