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만지기에 충분한 온도

조지아, 따뜻한 마을 판키시 따뜻한 사람 체첸

by 낭만히피

'우리는 하나예요. 그러나 같지는 않죠. 그러기에 서로를 더 보살펴줘야 해요.'


- 밴드 <U2>의 보컬 보노




코키는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공부한 일본인입니다. 물가 비싼 자국에서 여느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말하는 친구였죠. 그는 ‘나는 여행자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내 삶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다소 허세스러운 멘트도 곧잘 던지곤 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제일 흥미롭게 생각한다는 코키는 관찰하듯 제게 물었어요.


“당신은?”


그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며 답했습니다.


“글쎄요...”


나는 특이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로 무장한 이 친구는 굉장한 비밀을 알려줄 것처럼 속삭였어요.


“놀라지 말고 들어요. 사실 나 마흔 살이 넘었어요!”


아... 그렇구나....

그리곤 엄청난 제안을 특별히 저한테만 하겠다는 듯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판키시 라는 곳에 가볼래요?”


판키시는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로 주로 체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입니다. 여행자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아 많이 찾지는 않는 곳이지요.

굉장히 말이 많으며 독특해 보이고 싶어 하는 중년의 여행자(는 아니지만 여행자)인 코키와 함께 한다는 것에 잠시 주춤하고 있을 때, 구석에 있던 동그란 눈을 가진 귀여운 친구 히또미가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 집이에요. 같이 가요!”


히또미는 ‘체첸’에 관해 공부하는 대학생입니다. 4년 전, 그녀는 기자 친구를 통해 판키시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무작정 찾아갔더랍니다. 아무 정보 없이 간 그곳에서 다정한 체첸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제는 정이 들어 엄마와 딸처럼,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내고 있나 봅니다. 반년 전부터는 러시아어도 공부해 제법 대화도 나누곤 한다고 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던 지난 시간에 관해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말’ 이 아닌 것으로도 무수한 대화를 나누곤 하니까요.


그리하여 히또미, 코키, 그리고 저는 판키시로 향했습니다.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노랗게 물들어 그림 같이 예쁜 마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흙과 나무, 햇살 냄새에 마음까지 다 편안해집니다.


스카프로 머리를 가린 히또미의 엄마가 다정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해주십니다.

엄마의 언니인 이모, 이모의 딸, 아들 부부, 아이들까지 모두 나와 포옹하며 환영해주니 마치 오랫동안 못 본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정겨워 마음이 시큰합니다.

난로 주위에 모여 앉아 차가운 몸을 녹이고 있는데 엄마가 서둘러 음식을 내오십니다.

먼 길 온 손님들 배고플까 봐 빵, 쨈, 치즈, 차로 한가득 상을 보셨습니다.

단출한 식사였지만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든든히 배를 채운 우리는 다시 난로 앞에 쪼르륵 가서 앉았습니다.

소박한 시골집에서 제일 따뜻한 곳은 바로 이 난로 주변이었으니까요.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식구들 앨범도 보며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시종일관 까르르 웃으며 장난치고, 히또미는 내내 체첸 엄마 옆에서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동갑내기인 엄마의 딸과 저는 조심조심 서로를 알아가고...

노란 천장 불빛 아래서 물끄러미 우리들을 바라보던 코키가 말했습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이상해요. 무언가가 내 마음을 만지고 간 기분이에요.”


코키는 어릴 적 가족으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에는 그 이유도 한몫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족 중 누구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이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단호한 마음이 변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죠. 간절함보다 주저함이 더 컸을지도 모르지만요.


그 날 저녁 난로 앞 가족들의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쩐지 난로보다 더 따뜻했어요.

누군가의 마음을 만지기에 충분한 온도였죠.



어느새 히또미는 엄마의 품에서 아기처럼 사랑스럽게 잠들었고 저도 이른 시간부터 잠이 쏟아졌습니다.

식구들이 마련해준 아늑한 잠자리로 들어가 누워있는데 엄마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어요.


“내 딸 같다. 네가 참 좋아. 편하게 자렴.”


저도 코키처럼 마음이 이상해져 버렸습니다.

괜히 눈물이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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