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람이 불 때

길 위의 사람들 <아날로그 중국> 1

by 낭만히피


“그 배낭은 네게는 틀림없이 자유의 상징 같은 것이겠군?” 하고 오시마상이 말한다.

“아마도” 하고 나는 말한다.

“자유의 상징을 손에 넣고 있는 것은 자유로움 그 자체를 손에 넣은 것보다 행복한 일일지도 몰라.”

“때로는”하고 나는 말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연극이 끝났습니다. 초여름부터 준비한 공연은 가을을 지나며 막을 내렸고 그 동한 함께한 동료들과 아침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술에 취한 저는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고 인천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급하게 떠나게 됐다는 문자 한 통을 남기고 배를 탔습니다. 이제 스물여섯 시간 후면 중국에 도착합니다.




배 안에서 무역을 한다는 상인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중국 하청업자에게 곡식, 술, 담배 등을 사 와 한국 업자에게 팔고 한국 업자에게 또 다른 물건을 받아 중국에 다시 넘기는 일을 하는 분들입니다. 운반하는 물건 값에서 배 삯과 급여로 월 30만 원에서 50만 원 정도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배에서 나흘, 중국에서 이틀, 한국에서 하루로 많은 시간을 바다 위에서 지내시는 분들이지요. 우리는 막걸리를 한 사발 씩 나눠 마십니다. 어르신 한분은 해군 소령 출신인데 배 삯이 저렴하니 여행처럼 노니러 다닌다 하시고 다른 한분은 노후생활이 심심해서 한다고 하십니다.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손주들 아이스크림도 사 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이 일은 60대 이상의 어르신들만 할 수 있는 일로 배 안에 계시는 칠십여 명의 상인중에는 올해로 여든셋인 할아버지도 계신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다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분들은 저에게 인생을 가르칠 생각이 없는 보기 드문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옆자리에는 한국에서 식당일을 하신다는 조선족 분들이 계셨습니다. 작은 여관, 고시원 등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밥만큼은 최고로 잘해 먹는다고 호탕하게 말씀하셨지요. 그분들은 무료한 스물여섯 시간 동안 고스톱을 치기도 하고 고향집 냉동실에 얼려 놓은 개고기를 먹을 생각에 잔뜩 들떠 있기도 했습니다. 물론 꽤 많은 사람들이 멀미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요.


어쩐지 저는 편안했습니다.


갑판으로 나가 수평선으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디서 본 노을 풍광보다 가까이서 벌어지는 모습에 잠깐 놀랐습니다.



이제 여행이 시작되나 봅니다.

끝나는 날은 아직 정하지 못한 여행이.




도착한 선착장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 간쯤 걸려 북경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우루무치로 우루무치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카쉬카르로 가 국제버스를 타고 카라코람 하이웨이(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속도로)를 통해 파키스탄을 가고 싶었습니다.

파키스탄에 살구가 있을 때.

그러니까 아직 바람이 따뜻할 때.




하지만 계획은 북경에서부터 무참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서남북 어느 기차역에서 우루무치행 열차 티켓을 사야 하는지도 몰랐고 겨우겨우 찾아간 기차역 티켓 박스에선 “메이요!”만 되풀이했습니다. (도대체 메이요가 무슨 뜻이야!!!) 그건 티켓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중국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도 티켓을 구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앞으로 열흘 정도는 열차 티켓을 구할 수 없었고 방법은 하나, 입석뿐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고생을 자처한대도 40시간이 넘는 거리를 서서 가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살구가 있을 때 파키스탄을 가겠다는 낭만을 접어 두고 라도 당장 어디서 잘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와이파이? 그때는 몰랐습니다. 외국인은 일반 숙소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기억만 얼핏 날 뿐입니다. 하...... 밖은 깜깜하고 갈 곳 없고 말은 안 통하고 막막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납니다. 간단한 영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을 한 명만이라도 만나고 싶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터미널에서 냅다 외쳐댔습니다.


“헬프미! 헬프미!! 헬프미!!!”


이쯤이면 슈퍼맨 같은 사람이 나타날 때도 됐잖아.

없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터미널 곳곳을 돌아다니며 슈퍼맨을 찾다 지친 저는 바닥에 주저앉아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고 있었습니다.

망연자실 그렇게 얼마나 더 있었을까요.

자그마한 체구의 선하고 영민한 분위기를 지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그의 이름은 샌디.




글 : 히피

그림 : 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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