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사람들 <아날로그 중국> 2
내 발이 디뎠던 지난날이 책장 넘기듯 차례차례 떠올랐다. 나는 어쩌다 이곳까지 왔을까. 지난날을 하나하나 뒤져봤지만 그 이유가 적힌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발이 이끄는 곳으로 나도 왔다. 머리가 나를 이끈 적은 한 번도 없다.
-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우루무치로 가려면 열흘을 기다리거나 입석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요. 50시간 가까이 서서 가는 건 많이 힘들 거예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일단 오늘은 쉬도록 해요. 우리 집에서 머물면 좋겠지만 아내와 아이, 부모님까지 계셔서 불편할 거예요. 외국인들은 일반 숙소에는 출입이 안돼요. 내 아이디카드를 맡기고 숙소를 구해 봐요. 일단 여기서 나가죠. 짐 이리 줘요.”
제가 한사코 거부해도 샌디는 제 배낭을 짊어지었습니다. (그때 저는 지 배낭은 지가 져야만 한다는 나름의 철학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죠.) 배낭에 짓눌려 어깨가 바닥에 닿을 것 같을 때 샌디가 제 짐을 어깨에서 가져간 겁니다. 보기보다 무거웠는지 흠칫 놀라던 샌디의 얼굴을 저는 분명 봤습니다.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오랫동안 걷고 뛰었기에 저는 너무나 지쳐있었죠. 누군가에게 저의 짐을 지어주었다는 생각에 홀가분함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어깨만큼이나 발걸음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걸었습니다. 북경의 밤거리를 걷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여러 숙소에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한 곳에 짐을 풀었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작은 숙소의 모습. 아, 영화에서 본 그곳! 어느 감옥의 일인 실.
“일단 좀 쉬세요. 제가 잘 아는 여행사를 통해 비행기 티켓을 알아볼게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 우리 같이 밥 먹고 공항 가는 것 도와줄게요.”
샌디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는 선착장으로 돌아가 한국행 배를 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고마움을 느낄 새도 없이 죄 많은 저는 일인 실 감옥에서 씻는 둥 마는 둥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날이 밝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창문이 없었으니까요. 똑똑하는 소리에 문을 열었습니다. 샌디였습니다. 제 인생에 반가운 똑똑 소리 3위 안에 들 겁니다. 사실 샌디가 안 올까 봐 엄청 마음 졸였거든요.
“비행기 티켓을 알아봤어요. 오늘 저녁 비행기예요. 이게 제일 빨리 저렴하게 우루무치로 가는 방법이에요. 괜찮다면 예약해줄게요. 오늘은 차를 가져왔어요. 나가요. 나가서 밥 먹고 북경에 왔으니 구경도 좀 하고 공항버스 타는 곳으로 시간 맞춰 데려다 줄게요.”
그렇게 말하고 샌디는 또 제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느 쇼핑몰 푸드 코너로 가 아침 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샌디와 저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중국에 있는 유럽 기업에서 IT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샌디는 남부 ‘푸진’이란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두 살 터울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6살 난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느 중국 남편들처럼 집에서 요리는 본인 담당이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물었습니다. 왜 떠나왔냐고.
글쎄요... 왜 떠나왔을까요...
또 어떤 말들이 있었는지는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 분명히 기억하는 건 제가 많이 웃고 있었다는 겁니다. 집 떠난 지 3일째 제대로 씻지 못해 떡이진 머리와 누런 얼굴로 세상에서 제일 개운한 사람처럼 상쾌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웃고 나니 두 다리에도 어깨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힘이 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공항버스에 실을 때까지 내내 샌디는 제 짐을 대신 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사합니다.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샌디가 노르웨이로 이민 가는 소식을 전해주고 그의 아이가 자라는 것을 사진으로 보고 월드컵 경기라도 있을 때면 마치 함께 보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응원합니다.
다시 만날 땐 꼭 제가 샌디의 짐을 대신 들어줄 겁니다. 깨끗한 모습으로. 슈퍼맨처럼.
한결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루무치에는 하루 정도 쉬어갈 예정이었기에 유스호스텔 주소를 적어 두었습니다. 이 주소가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오늘은 공항에서 눈 좀 부치다 내일 일찌감치 숙소로 가야겠습니다. (늦게 다니는 것보다 공항이 안전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젠장. 쫓겨났습니다. 우루무치 공항은 새벽에는 문을 닫아 누구도 이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글 : 히피
그림 : 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