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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흡수 Aug 05. 2024

임진왜란 영웅전 [송상현]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


인접한 해안의 군진이 모두 불타오르고 선량한 우리 백성들이 악랄한 왜인들의 무자비한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부산진의 정첨사, 다대진의 윤첨사 그리고 서평만호가 목숨 다해 분전했지만 끊임없이 몰아치는 왜적들에게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며 동래 연안의 군진을 모두 무너트린 조총의 위력이 이곳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악독한 것은 바로 왜인들의 심성이었다.

그들의 손 속은 사정없이 잔악무도했다.


제승방략에 따라 인근 고을의 모두가 이곳 동래성으로 집결할 것이며 이미 좌병사 영감이 울산군수와 함께 이곳에 주둔 중이니 놈들을 격퇴하여 반드시 이곳을 사수할 것이다.


(*좌병사 :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울산군수 이언성)


악랄한 왜인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저놈들의 칼날에 우리 백성 모두가 위험해질 터이니 나의 모든 것을 불태워 여기 동래성을 반드시 지키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왜적들이 몰고 온 죽음의 공포는 파발꾼들의 발보다 더 빠르게 경상도를 잠식했다.


아침 일찍이 동래에 합류한 좌병사 영감은 조방장에게 명하여 주변을 정탐하여 적의 위치와 규모를 우선적으로 파악하라 일렀다.


조방장은 동래부의 십리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와 두 눈으로 본 것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좌병사 영감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밖에서 적을 견제할 터이니 송부사라면 문제없이 이 성을 지킬 것이오."

"영감. 영감이 계셔야 군사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됐소. 더 이상 붙잡지 마시오."


병마절도사의 책무인 병력의 규합을 위해 동래 외곽에 진을 치고 적을 견제하겠다며 좌병영의 병사들을 이끌고 매몰차게 동래성을 떠났다.


...


정탐을 나갔던 병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연안의 군진을 전부 함락시킨 왜적들이 모두 여기 동래성을 향해 집결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마구 해하는 악랄한 인간들의 소문에 떠날 사람들은 모두 동래를 떠났다.

남아있는 모든 군민들은 오직 나만을 바라보았다.


숨이 차오르고 어깨가 무거웠다.


도무지 감당할 재간이 없는 적의 대 병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어느새 머리는 차가워지고 가슴은 뜨거워졌다.

남문의 가장 높은 성벽에 올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적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먼발치에서 보이던 놈들이 순식간에 성을 둘러싸는 중에도 당당히 대북을 울려대며 우리 군사들을 고무시켰다.


성을 포위한 채 미동도 없는 왜적들의 진중에서 한눈에 봐도 흉흉한 기운이 넘쳐나는 지휘관의 무리가 어슬렁 거리며 튀어나와 그들의 뜻이 담긴 목패를 세웠다.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

(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겠다면 길을 내어 놓으라니..

우리의 군진을 박살 낸 것도 모자라 선량한 백성들을 무참히 살해하고는 의로운 척하는 이 더러운 위선자 새끼들이 교활하고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항복 따위는 절대 있을 수 없다.


'戰死易 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주긴 어렵다."


동래성의 의지를 담아 성 밖의 놈들에게 목패를 던졌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적장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지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놈은 앞서 나왔던 무리를 되돌리며 턱짓과 눈빛으로 무언의 명령을 내리자 고요하던 적들이 사납게 돌변하더니 세 겹으로 된 군세가 괴성을 지르며 맹렬히 달려들었다.


판자방패를 앞에 두고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선두의 적병들이 여럿 고꾸라졌지만 왜적들은 그들의 시체를 짓밟고 전방위에서 몰려왔다.

우리 군사들은 더욱 맹렬히 활시위를 당기자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는 화살은 놈들의 머리와 심장 중심에 박혔다.

그럼에도 왜적들의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았았다.


놈들은 허리춤에 내걸린 장대 같은 깃발에 핏빛처럼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매달아 사람들을 현혹했다.

죽음의 공포는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지척까지 다가온 놈들이 대열을 갖추고 조총을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댄 순간 성벽의 위 우리 병사들은 

판자방패 뒤로 몸을 숨겼지만 놈들이 쏘아대는 탄환은 우리의 방패를 모두 관통하고 군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일순간 여럿이 전투 불능에 빠지며 혼란은 가중되었고 이때를 틈타 이성이라고는 없어 뵈는 흉악한 놈들이

모든 성벽에 사닥다리를 걸고 들러붙었다.


굉음을 내는 탄환이 계속해서 날아왔지만 우린 굴하지 않고 전신을 드러내며 궁시로 응전했다.

백성들까지 성벽 위로 올라와 기왓장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고 기어 올라온 왜적들의 면전에 낫과 호미, 괭이를 박아 넣었다.

모두가 분전하며 성벽을 사수했지만 놈들의 지독한 맹공에 동문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모든 것이 이때부터였다.


동문을 수복하기 위해 장졸들이 달려간 순간 팽팽하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성벽에서 물러서지 않던 우위장 양산군수 조영규와 조방장 홍윤관이 쓰러졌다.

곧이어 비장 송봉수와 김희수가 병졸들의 선두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교수 노개방과 향리 송백마저 백성들을 보호하다 왜적들의 칼을 피하지 못했다.


모두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벌레떼 마냥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왜적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래의 군사들, 백성들 모두는 자신의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놈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악귀 같은 놈들에게 쫓겨 더 이상 도망갈 곳 없이 지붕으로 올라 기왓장을 던지는 아낙들의 처절한 모습에 억정이 무너졌다.


괴롭고 비통했다.


곳곳에서 괴성과 비명이 어지럽게 울리는 아비규환에 활기 넘치던 동래는 죽음의 고을이 되었고 웃으며 지내던 백성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쓰리고 원통했다.


동래의 모두가 죽음 앞에서 처절하게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여기 동래성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 어떠한 지옥도 이곳보다 처참하고 처절하진 않으리'


동래의 수많은 생명을 수호하지 못한 나를 데려가기 위해 염라의 심부름꾼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갑주 위에 조복을 걸치며 상이 계신 곳을 향해 사배를 올리며 나의 시간이 다 하기 전 마지막으로 부친께 올리는 글을 써내려 갔다.


...


孤城月暈  (고성월훈) 

외로운 성에 달무리가 지니

列陣高枕  (열진고침)

이웃 군진은 깊이 잠들었도다

君臣義重  (군신의중)

임금과 신하의 의는 무거우니

父子恩輕  (부자은경) 

아버지와 아들의 은혜는 가벼이 하오리다


...


『 그 어떤 무인보다 기개가 뛰어났던 문신 송상현은 동래성의 남문에서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다. 

적장 코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의 용기와 기백에 감복하여 동래를 점령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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