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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Mar 18. 2021

이전처럼 살 수 없게 하는 글

책  <임계장 이야기>

1.

읽고 나면

도저히 이전처럼 살 수 없는 글이 있다.


그것이 어떤 장르이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이전과 같이 살 수 없게 만드는 글.


그런 글이 진짜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읽으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내 삶의 어떠함이 부끄럽고

누군가에게 한없이 미안해져서 슬 한편

삶을 속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 기쁘다.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 이야기'가 그랬다.




2.


임계장 이야기

38년간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2016년 퇴직 후,

4년째 시급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분의 일기.




이제 이 글을 통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고자 한다.

(중략)

내 글이 나이 든 시급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을 온전히 풀어내지는 못할지라도, 

나와 동료들이 겪었던 고단함만은

진실하게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 <임계장 이야기>의 '들어가며'- 



이제 읽기 시작했 뿐인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계약직 청소 아주머니와

분리수거 담당 노인장이 떠올랐다.



몇 년간 아이를 키우며

평일 낮에 단지 안을 뻔질나게 돌아다녔다.

그전까지는 그들의 존재조차 몰랐다.


낙엽을 치우지 않아도

저절로 길이 깨끗해지는 줄 알았다.


주민들이 개판으로 해놓은 분리수거

저절로 정리되는 줄 알았다.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그분들을 진짜 그림자 취급했다.


'명품아파트 만들기', '집값 지키기'라는 단어가 쓰인 현수막이 걸릴 때 

그 현수막 아래서

쓸고 닦고 노동하는 그들이 있는 줄 몰랐다.



슈테파니 언니

날이 궂을때마다 그분들 걱정을 는데

'와. 언니는 참... 사돈의 팔촌까지 걱정을 하네~'라고 생각했다.


언니가 그분께 '너무 추운데 고생하신다. 국밥이라도 사드 시라'며 2만 원을 쥐어드렸다 할 때도 의 일처럼 덤덤했다.


'일한 만큼 받으실 텐데?' 하며.


나는 마리 앙투아네트다.

'밥이 없다고? 그럼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나이 지긋한 그분이 돈을 받으며

90도로 허리를 굽혀 고마워했다는 걸 들었을 때도

나는 '땡잡으셨네' 했다.


누가 누구의 땡을 잡은 걸까.

누가 누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의 몇 페이지를 채 읽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런 날들의 내가

몹시도 몹시도 부끄러워다.




3.

'언어화'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언어'로 풀어내는 것.

그래서 전혀 몰랐던 삶의 이야기가 바깥으로 꺼내어지는 것.


이것이 글을 통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인 것 같다.


장르로는 '르포르타주(보고문학, 기사문학)'라고 하더라.

(꽂히는 뭔가가 있는데 그걸 구현할 수 있는 이미 잘 닦여진 어떤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고난 후 너무 설레였다.

팬클럽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광팬의 마음이랄까)





몇 년에 걸쳐 담임을 할 때 

자퇴를 하고 싶어 몸살을 하는 아이들을 종종 만났다.


'우울증'은 '자기 머리로서는 답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면 걸린다는데,

많은 아이들이 경증이든, 중증이든,

약을 먹든 안 먹든,

인정하든 안 하든,

정신적으로 불안불안 위태위태했다.



학교는 이미 그들의 어떤 것도 소화해주지 못했

본인과 그들의 부모는 '고졸 졸업장'이 필요했다. 



부모의 기대.

부모가 자기한테 이제까지 들인 투자,

사회적 시선 때문에 

차마 자퇴를 하지도 못하겠

학교에 몸이 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했다.


진퇴양난.

몸과 마음으로 드러나는 고통.


나는 '웅웅웅' 알 수 없는 바람소리 같은 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밖으로 꺼내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졸업한 아이들을 불러다가 인터뷰를 하고

인터뷰집을 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임계장 이야기를 읽을 때처럼

부끄럽고 슬프고 기뻤다.



이미 20대 중반이 된 이야기 속 아이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네 얘기를 좀 해줄래?'라고 물었던 누군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들의 삶에 유일할까.


부디 유일하지 않았으면.






4.


우리는 예능이나 드라마나 영화나 유튜브 영상 클립 등을 통해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극적인 비극을 본 뒤에도 대체로 별 탈없이 일상으로 복귀한다.


숱한 미디어 콘텐츠가 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은 어제의 내가 변함없이 오늘의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정화 역할을 한다. p142 < 부지런한 사랑-이슬아>


한편


진정한 슬픔과 분노는 우리의 존재를 뒤흔든다.

원래 자리한 위치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고 방황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중략) 그 슬픔은 너무도 불편하여 우리를 어제와 똑같은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p143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임계장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는

너무나 불편하 어제와 똑같은 존재로 남을 수 없겠다.


어제 사서 선생님이

이 학교 어떤 국어 선생님께서

올해 이 책을 다량 구매하여 학생들과 수업시간에 다룰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려주셨다.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학교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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