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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Mar 21. 2021

타인이 될 너에게

누가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는가


1.

"내일은 우리 엄마가 데리러 온다~~"


준이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 자랑을 한다.  

 

지난 금요일.

처음으로 육아시간을 쓰고 일찍 퇴근했다.


유치원 입구에서 아이를 기다리는데

무척 설렌다.


내가 오는 걸 며칠 전부터 기뻐하는 너.

내가 오는 걸 동네방네 자랑하는 너.


고맙다.


눈과 입으로는 달려오는 너를 향해 환호한다.


동시에

나에게 달려오는 너의 이 순간을 잡고 싶어

핸드폰에 이 장면을 고이 담는다.







2.

준이가 무척 좋아했다 하니

지인들이 한숨을 쉬며

집구석 아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등학생 아들을 둔 지인은

아들을 학교에 데리러 갔더니

멀~찍이 자기랑 떨어져 걸어서 씁쓸했다 했다.


깔깔거리는 아들 웃음을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단다.


옆자리 부장님도

아들을 키웠던 시절이 전생처럼 아득하다 하셨다.


이제 청년이 된 그는

엄마의 전화는 곧잘 씹고

얼굴이 해맑은 날은

어김없이 여자 친구를 만나고 온 날이란다.




결혼도 하기 전의 나는

10년 동안 사춘기 (남자) 아이들의 담임으로 일했다.


온 힘을 다해 엄마를 밀어내는

남의 아들들을 보았다.


엄마들은 그 당시 처녀였던 나에게

눈물 콧물 빼며 아들에 관한 별 이야기를 다 하고는

자기가 학교에 왔다는 사실은

아들에게는 1급 비밀이라고 했다.  

 

집에서는 도통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주요 정보를 얻는 곳은 따로 있다 했다.


같은 학교 여자아이들 엄마를 소식통으로 삼거나

가정통신문이라도 보려고

아들 몰래 가방을 정기적으로 뒤진다고.  


아들이 어릴 때 사진을

핸드폰 메인 화면에 저장하고 다니는 엄마도 여럿 보았다.


타인처럼 낯설어진 아이가

그 옛날 내 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열정이 뻗쳤던 해는

매일 '학급 통신'같은 것도 발행했었는데,

학급의 소통을 위해 시작했던 그 뉴스레터의 광팬은

남자아이들의 어머니들이 되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그러나 너무나 궁금했던 아들의 학교생활이

그 종이에 다 있다나 뭐라나.


'올해 선생님 너~~ 무 마음에 든다'며 나를 치켜세울 때

얼떨결에 나는 그들의 사립탐정이 되어있었다.


'엄마와 사춘기 아들'


그들의 중간에 서서

아들 엄마의 마음고생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한편,

악의라고는 1도 없는 아들들의 마음도 듣게 되었다.


얘네에게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자존심'이나 '능력'과 같은 말이었고

'마마보이'라는 평가는

또래 사이에서 '죽음'을 의미했으며

그래서

'엄마와의 분리'

'생존'을 위해 달성해야만 할 '생명' 과도 같은 과제였다.


그래서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독립적이었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잘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엄마 쪽이었다.

섭섭함도 안타까움도 두려움도 다 누구 거?


엄마 꺼. 


아들이 준 게 아니라

엄마가 혼자 느끼는 거다.


아들은 자극일 뿐.

원인이 아니다.


아들은 그저 성장하고 있는 것인데

생존하려는 몸부림인데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인데


소통과 친밀함의 욕구가 가득한 엄마에게는

그게 참 아프다.


너무나 많은 것을 일찍이 보고 알아버린 나는

아들 엄마의 마음고생이 두려워

아들을 낳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


이런 내 바람을 알고

창조주가 아들을 턱~하니 주신 것을.






4.

직장에서 2주 정도 까치집을 관찰했다.

4층에서 5층으로 가는 계단이 제일 잘 보여 자주 서성였다.


까치 부부가 얼마나 야무지게 나뭇가지를 주워 나르던지!


나는 생전 처음 새가 둥지 짓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며

넋을 잃고 경탄했다.


부리로 가지를 툭~ 부러뜨려와서

참으로 열심히도 자기 집을 만들고 있었다.


'저렇게 해서 언제 되려나...' 싶었던 것이

매일매일 제법 집의 모양이 되어갔다.



까치집




고급 정보에 따르면

이 둥지 짓기 프로젝트는 몇 년간 이어진 것이고,

작년과 재작년에는 실패했다 했다.


이 지역이 새로 개발된 이라

나무들이 작고 야위어서 둥지를 얹을 만큼 튼튼하지 않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바람골이 많아

짓다가 중도에 무너져버리거나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했다.  


집 없는 설움 히스토리까지 들으니  

이들의 둥지 짓기 프로젝트를 얼마나 간절히 응원하게 되던지!

지어놓고 나면 얼마나 안심되고 행복할까!


나는 흠뻑 감정이입을 해서

'까까'와 '치치'라는 유치한 이름도 지어주었다.


까까와 치치 쪽에서도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둥지의 구석구석 안쪽까지.

둥지를 만드는 일거수일투족까지.

부리를 마주대며 깍깍거리며 서로 의사소통하는 모습까지.


주말이면 직장에 있는 까까와 치치가 보고 싶을 정도였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까치집으로 출근해야지~"라고 중얼거리며

차에 시동을 켰다.



그런데, 어느 날,

까까 치치가 보이지 않는다.

둥지는 있는데.

어디 갔지?


어디 간 거니?


웨어 얼~ 유~~~?


한참을 찾았다.


나처럼 까치집을 즐겨 관찰하는 동료에게 물으니

바람이 세서 지붕까지 만든 거라고, 

몰랐냐고 한다.



둥지 위로 지붕을 만들었다고?


지붕도 만들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더 둥지 근처를 서성였다.


그러나 덮어버린 둥지 안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 안에서 뭔가 복작복작하는 것 같았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관음증을 들킨 것 같아 민망했다.


사랑과 관심을 거부당한 것처럼 서운했다.


모든 것을 나와 공유하던 이가

갑자기 셔터문을 내려버린 것처럼 무안했다.


둥지 짓기는 지붕공사까지 대성공인데

이상하게

나는 빈 둥지 증후군을 앓았다.


그들은 사랑하는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몇 년 만에 아늑한 집을 마련했다.

알도 낳을 것이고,

아기도 낳을 것이다.

아기새를 키워내며 열심히 가정을 일굴 것이다.


그들의 성장을 함께 응원하며 기뻐하던 내 역할은

이제 끝났다.  



그들은 사실 내  응원이 없어도

스스로 삶을 살아갈 힘과 능력을 갖고 태어났었다.

내쪽에서 까먹은 것일 뿐.



지붕이 덮힌 둥지


5.

까까와 치치를 보며

준이를 떠올렸다.


발가벗고 있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엄마한테 안겼던 지난 3년 반을 떠올렸다.


불과 몇 개월 전 기저귀를 떼던 시절

응가가 마려울 때마다 "나 기저귀 해 떠?"라고

지 기저귀 착용 여부를

나에게 물었던 준이를 떠올렸다.


응가 쌀 때마다 변기에 앉아 두 손을 맞잡고

같이 "끙~"하며 깔깔대던 순간을 떠올렸다.


창조주가 에덴 동안에서 무척 행복했을 거라는 것을

아이를 낳고 알게 되었다.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원하고 사랑하며

발가벗고도 자기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몰랐던 아담과 하와와 살았던 창조주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는 아들은

몇 년 후면 어느 날 예고 없이

둥지를 덮어버리고

낯선 타인이 될 것이다.


둥지를 성공적으로 만들기까지

너에게 물심양면의 지원과 사랑을 아끼지 않을 나는

둥지가 닫히박수를 쳐주며

담담히 뒤돌아서야 한다.


너는 건강하게 성장할수록

나에게서 완전하고 깔끔하게 독립하겠지.


나는 머리로는 이것이 순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날이 오는 것이 두렵다.

그날들이 과연 익숙해질 수 있을까 걱정된다.


그리고

오더라도 조금은 더디 오기를 내심 바란다.






6.

5세 아이를 보는 나의 마음이

엄마를 밀어낼 나중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

나는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지.




5세 아이를 보며

나중에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내 전부를 주기를 주저한다면

나는 너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이지.




방어기제와 두려움이 덕지덕지 붙은 마음으로

아들을 대하는 나를 본다.


까치처럼 지 살길 다 갖고 태어난 애를

책임지려고 하다가 버거워하는 나를 본다.



그에 비해 어머님의 손주 사랑은

굉장히 단순하고 원초적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고도

더 주고 싶어 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결과 깊이가 다르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다.


그 다름이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조차

나는 안다.


어머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가득 품은 내 사랑보다는

세련되지 못할지언정

훨씬 온전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누가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는가





낯선 타인처럼 결국은 멀어질 너이지만

나는 '두려움이 없는 사랑'으로

오늘 이 순간

온전히 너를 사랑하고 싶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한일서 4장 18a)



<100 인생그림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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