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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ㅡ앎을 삶으로 만드는실험
당신 손이 내 허벅지에 있네요(2020.0529)
비폭력대화(nvc)를 삶으로 살아내기 - 10화
by
유하나
Jan 7. 2021
1.
당신 손이
지하철에서
누가 내 허벅지를 만지는 게 느껴진다.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 이 미췬놈아!
너 나랑 경찰서 가고 싶냐?''
말로 후려치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
거기 있는 사람들 다 듣게!
그 사람이 혼이 나가버리게!
그런데...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내가 나를 아는데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다.
쫄보 중에 쫄보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를 떠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날 밤 혼자
분
노의 일기나 쓰고있겠지.
그런데 오늘 어떤 글을 읽다가 희망이 생겼다.
성추행 대처법에 관한 글이었는데
이 정도 반응은 나도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군가 허벅지를 만질 때 그 순간
이렇게 말하란다.
''어머! 왜 이러세요!''가 아니라
그 사람 눈을 똑바로 보면서
'' 당신 손이 내 허벅지에 있네요''
그러면 의외로 그 상황이 쉽게 정리되는 경우가 많단다.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비폭력대화를 배운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분명히 비폭력대화의 첫 단추, '관찰'이다.
순도 100프로의 관찰.
2. 관찰의 쓸모
한참 전 봤던 어떤 양육서도 떠오른다.
아이에게 근거 없는 칭찬은
외려 안 하는 게 낫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노란색과 파란색 색연필로
뭔가를 끼적이고 있을 때
괜히 가서 ''우와~ 진짜 잘 그린다!'' ''최곤데?''
하지 말란다.
지도 안단다.
안 잘 그렸고
안 최고라는 거.
그냥 '' 준이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뭘 그렸네?''
하고 아이 행동을 관찰하고 읽어주란다.
또 다른 색으로 다른 걸 그리면
''보라색으로 그렸구나~'' 하고 읽어주고.
결국.
육아도 관찰이네?
이 정도 되니 '관찰'은
성폭력 예방에 ~
육아에 ~
관찰만 잘하면
고혈압. 당뇨. 암까지 치유될 지경이다.
3. 나를 관찰하기
<아이는 사춘기 엄마는 성장기> 66p
"평가가 들어가지 않은 관찰을 하는 것이
인간 지성의 최고 형태이다. "
ㅡ인도의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 ㅡ
문득 이 인간 지성의 최고 형태라는걸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타인을 관찰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축에 속한다.
어디까지나 남 얘기니까.
나를 관찰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어떤 괴물이 툭 튀어나오든
내 눈으로 직접 그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나를 관찰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용기인 것이다.
20대 초반 받았던 라식 수술이 생각난다.
이 라식수술은 글쎄
의식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채로 진행됐다.
내 눈을 깎는 과정을 보았다.
정말이지 No thank you 였는데!
그냥 픽~ 프로포폴이나 맞고 기절해있다가
수술이 다 끝나면 깨워줬으면 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사 선생님들은 내가 실수로라도 눈을 깜빡이지 못하게 기계로 꽉 잡아놓았다.
꼼짝없이 모든 수술 과정을 봐야 했다.
너무 끔찍해서 온몸이 얼어붙었다.
수술하는 동안 '내가 미쳤다 미쳤지'하며 후회막급이었다.
그런데 몇 주 뒤에 눈이 환~하게 회복되고 보니
이건 내 인생에 제일 잘한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맨눈으로 이렇게 잘 보일 수 있다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벽에 시계가 보이다니!
이제 렌즈를 사고 닦고 끼고 빼지 않아도 되다니!
더울 때 안경 자리 짓무르지 않아도 되고
추울 때 김이 서리는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다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영화 < 시계태엽 오렌지>
나를 관찰한다는 건
라식 수술 같은 걸까.
나에 대해 직면할 용기를 내고 나면
선물로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
이번 주 기린 부모 숙제는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3종 세트 때문에 내가 했던 일들을 관찰로 적기'다.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들도 있고,
도저히 다룰 엄두가 안나는 사건들도 있다.
난이도 최상이었던 순간을 떠올리면
깊은 후회가 몰려오고
슬프고 안타깝고 미안하고 절망스럽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하면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돌려진다.
맨 정신으로 보기가 고통스럽다.
외면하고만 싶다.
'나중에 더 편안해지면 할래?'와
'나중에 또 언제 하려고?! '
하는 두 마음이 싸운다.
막상막하다.
4. 왕건이 코딱지
오늘도 자기 전에 아들의 왕건이 코딱지를 빼줬다.
쌕쌕거리며 숨쉬기가 엄청 불편해 보여서 달려드니.
"아냐~ 난 괜찮아~! 안 할 거야!
싫어 싫어!
지금 안 할래! 나중에!" 하며 줄행랑을 치며 저항한다.
결국 엄마 손에 붙잡혀서 할 수 없이 빼고 나서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본다.
'아 진짜 시원하네?!' 하는 표정으로.
아들 코딱지만 맨날 빼고 있지 말고
이 기회에 내 마음의 왕건이를 빼볼까.
술의 힘 말고
숙제의 힘을 빌어서.
유일한 준비물은
직면할 용기지.
다음 주 목요일 수업 때까지
결국 나는 이 준비물을 준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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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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