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2 지구인으로서의 예의

비폭력대화(nvc)를 삶으로 살아내기 - 6화

by 유하나


1. 지구. 우리의 '에어비앤비'



그러니까.
정확히 5일 전부터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의 주인인 '지구'에게
잠시 집을 빌려 살고 있는 투숙객으로서

무개념 진상 고객 짓은 그만두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로 한 것이다.

내가 이 집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 이 집에 계속해서 살 수 있도록.
(내 아이를 상상하면 바로 현실감이 솟구친다)

집에서 마스크를 쓰고 방독면을 써야만 하지 않게.
말 그대로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2. 5일 동안의 실천과 그 대가



대단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다.
그냥 되는 대로 해봤다.

첫째, 선택할 수 있을 때 플라스틱 구매를 피했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진짜 노답이다.
재활용도 거의 안되고, 썩지도 않는다)

그 결과 돈을 더 썼다....
지구를 위해 돈을 더 써야 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가성비'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된 세상에
일부러 돈을 더 써야 하다니!

내가 간 마트에는
종이팩에 담긴 우유가
흰 플라스틱 통에 담긴 3.3L 우유보다 몇백 원 비쌌다.

구두쇠인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벌벌 떨며
플라스틱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기 위해
종이 우유를 선택했다.

- 느낌: 계산대를 나서는데 의외로 완전 뿌듯
- 충족된 욕구: 앎과 삶의 일치, 지구와의 교감



두 번째, 썼던 비닐을 재활용했다.
(비닐쓰레기도 플라스틱이랑
노답 쌍벽)

안 그래도 돌 밥돌 밥(돌아서면 밥)인데
이 와중에 비닐을 씻고 말리고 앉아있다.

난생처음 해본 일이다.

시간과 에너지가 들고,
비닐이 부엌에 거꾸로 매달려있으니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내 취향에 거슬린다.

저걸 어떻게 해야 바짝 말릴 수 있을까?

거는 방법,
각도,
말리는 장소,
도구...
곰곰이 생각해본다.

- 느낌: 호기심이 가득한, 뿌듯한
- 충족된 욕구: 앎과 삶의 일치, 지구와의 교감





세 번째, 말짱한 걸 버리지 않는다.

연말에 묵었던 펜션에서
쓰던 비누를 가져왔다.

비누를 두고 떠나려는데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떠올라서다.
(실화란다. 아쉽게도 책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 출신인 어떤 청년이 출세(?)해서 미국 호텔방에 처음 묵게 된다.
그는 화장실에서 새하얗고 동그란 비누를 써보고 황홀해한다.
카운터로 내려가 묻는다.

"공짜인가요?"
- " 그럼요"

"제가 가져도 되나요?"
- "그럼요. 내일이면 쓰레기통에 버려질 건데요"

미국 전역에서 단 한 번쓴 비누가
그날 바로 버려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날 밤 그는 한 잠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프리카에는
비누 한 개가 없어서 친족과 마을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호텔에서 버려진 비누를 제3세계로 보내는 사업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가 먹은 과자 소포장지에 비누를 잘 담아왔다.
미끌미끌 젖은 비누를 가방에 담아오려니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귀찮음은 잠시.
지금 집에서 너무 잘 쓰고 있다.

볼 때마다
유기견 입양해온 것처럼
'널 안 데려왔으면 어쩔뻔했니~' 하며 눈길이 가고 정이 간다.

- 느낌: 기쁜, 신나는,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 충족된 욕구: 앎과 삶의 일치, 지구+비누와의 교감





3. 갈길이 멀다


며칠 전 묵었던 펜션에서 나오며
3인이 하루 동안 양산한 쓰레기를 보는데...
가관이었다.
어마하게 큰 봉지로 두 개나.

지구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래도...
육개장 사발면이 너무 맛있었는데...
하나씩 소포장된 아이 과자 비닐은 어쩔 거니....
'국물떡볶이' 같은 레토르트 식품은 대부분 플라스틱에 담겨있다.

내가 이런 것들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그중 포기가 안 되는 가장 대표적인 것만 이야기하자면

1) 플라스틱 빨대



다섯살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혹이 다돼가는 내 얘기다.

0-1세에 해당한다는 구강기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플라스틱 빨대가 너무 좋다.

빨대로 음료를 먹으면 심신이 편안해진다.
다 먹고 나면 빨대를 잘근잘근 씹는다.

후식이다.

유리 빨대는 씹을 수 없고,
(악. 이빨이..)

종이 빨대도 씹을 수 없다.
(에퉤퉤..)

이 사랑스러운 빨대와 어떻게 이별을 하지?


2) Fur


덮어놓고 이뻐 보인다.

가장 최근에 산 패딩은
Fur가 풍성히 붙은 패딩이다.

처음 봤을 때
'동물 몇 마리를 학대한 거야ㅠㅠ'라는 찔림이 있었지만
할인이 70프로 이상 들가는 걸 확인한 순간.
찔리던 느낌이 온데간데없이 마비되고
나도 모르게 카드를 건네고 있었다.

이미 산 걸 어쩐담.
요즘 내 최애템인데...

'괜찮아. 내키는 만큼,
기꺼이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조금씩 바뀌자.'

나에게 말을 건다.


4. 일치. 그 아름다운 힘



그동안 알고 있는 것을 너무 실천하지 못했다.

각종 미디어에서 플라스틱의 실체를 보도했고,
기후위기는 이미 상식이 되었다.

몇 달 전에는 남편한테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기상학자들이 연구를 하다가 결국 자살을 한대.
몇십 년 뒤에 지구가 어떻게 될지를 확인하고서.
희망이 없다고 확신하는 거지.
이미 지구는 암 3기나 4기래.
완치는 불가능하고 죽음을 늦추는 연명치료만 할 수 있다더라."

이 말을 들을 때도
'아.. 끔찍하다.' 고 생각하고 다음 날 까먹었다.

보고 듣고 읽었는데
아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지를 못했다.

그 간극에서 오는 무기력과 찔림이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어느 파워블로거(최다혜 씨)의 글을 읽고
나도 며칠간 작은 실천을 해봤는데
신기하게도 엄청난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5일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종이 우유를 샀고(돈이 몇 백 원 더 들었지만),
비닐을 씻어서 또 썼고(번거로웠지만)
비누를 입양해온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좀 번거롭지만,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지만,

내가 믿는 것을 삶으로 살아낼 때
그때 샘솟는 힘!! 이 있었다.

모든 것을 지금 당장 바꿀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내 '일상' 안에서 할 때,
그때 생기는 자부심! 이 있었다.

그간 소비 체제에 속절없이 빼앗겼던 주도권을
비로소 되찾은 것 같은
광복의 기쁨과 희망이 있었다.

코로나로 '새해가 왔나' 싶은 연말 연초였지만
내 마음에는 분명 새 마음이 왔다.

그 마음을 꾹꾹 눌러
지구에게 신년카드를 쓴다.

'2021년에는
예의를 지키는 투숙객이 되어보겠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21.0101 겁 없는 시댁 vs 유도리 없는 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