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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Feb 04. 2021

딸 노릇 (2021.0203)

비폭력대화(nvc)를 삶으로 살아내기 -34화


1. 딸 노릇



"할아버지가 딸이 없어서
니가 딸 노릇 하느라 애쓴다"

아빠가 말한다.

나는 잔뜩 속이 꼬일 대로 꼬여서
이렇게 생각한다.

'딸이 거기서 왜 나와?
이거 아빠도 할 수 있는일이거든?'



"고생했어요~~~ 역시 딸이 있어야 돼~"

친한 언니가 말한다.

나를 격려해주려는 의도로 한 말이지만
마음 한쪽이 답답해진다.

'이런 일은 딸만 해야 하나요?'




'딸' 이야기만 나오면
남이 어떻게 말하든 '강요'로 듣는다.

귀가 단단히 망가진 나를 본다.


'강요'로 듣고 나면 '종'하거나 '저항'하게 된다던데
내 기질은 '저항파'쪽이라
이렇게 며칠간 마음이 시끄럽다.  


안 하고 있는 딸에게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지금 하고 있는 딸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는


딸 노릇







2. 소중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치셔서 수술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자립의 욕구, 자식 배려의 욕구가 무지하게 강하신 분이라,
할아버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할머니까지 같은 병실에 입원시켜버리셨다.
그리고 자손들에게는 수술 들어가는 당일에 알리셔서, 아빠와 내가 놀라 기절하게 만드셨다.  

갑자기 입원하셨다가 갑자기 수술하시고
한 달이 어찌어찌 지나고 보니 집안 꼴이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퇴원이신단다.


할아버지 집 대청소를 하고 왔더니
지인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

"딸이라서~"
"딸이니까~"
"딸 대신"
"역시 딸이~"

그런데 이 말이 상당히 불편하다.

비폭력대화에서 배우는 '꼬리표'의 전형이다.
칭찬인 것 같은데?
인정해주는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이 안 좋다.

부담스럽다.

계속하라는 건가?
나 나중에는 못할 수도 있는데?

그리고
나는 딸이라서 한 게 아닌데?
여자라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다.
정말 이분들께 '도움'이 되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 있나?


나는 온 인류가 똑같이 갖고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욕구'가 그 당시 있었고, 그 바람에 따라 움직인 거다.


손녀'딸'이라서 한 게 아니고
'여자'라서 한 게 아니란 말이다.





3. 어제 그 순간, 나에게 그 욕구가 아주 컸을 뿐


총체적 난국



냉장고 속 음식은 썩어가고
화장실은 쓴 사람이 없는데도 찌린내가 나고
베란다에 양파 한 박스는 싹이 났고
화분들은 말라죽어가고
심지어 한 달 전에 쓰시던 가습기 물까지 차있다.
오 마이 갓.
(가습기는 복구 불가,세척도 어려운 구조라 혹시나 또 쓰실까 봐 버려 버렸다)


아 진짜 눈뜨고 못 보겠네.

알고 지내는 가사도우미 이모님께 당장 SOS를 쳤다.
그리고 오랜만의 격렬한 육체노동을 하고 밤에 장렬히 전사했다.
(그래서 구독자들께 다음날 아침. 브런치도 못 차려드린 것이다)


청소를 하고 나니 후련하고 시원하고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내가 정말 손녀'딸'이라서 그런 건가?

우리 조부모님이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했을까?

대답하는데 몇 초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YES다.

만약에 내가 잘 알고 지내며 좋아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계시고,
그분들이 병으로 한 달간 집을 비웠고
(그래서 그 집의 모든 것이 썩어가고 있고)
이번 주에 집으로 돌아오신다고 한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누군가를 섭외해서 청소를 하러 갔을 것이다.


내 이런 심한 오지랖은 어디서 온 걸까.
 
글로는 성경에서 배웠고
삶으로는 교회에서 배웠다.


그렇다.
요즘 그렇게 욕을 처먹는 그 교회.

겨울 주말이면 어른들은
근처에 살고 계신 독거노인들께 창문 뽁뽁이를 붙여주러 가셨다.

 노인분들이 '소중한 분들'이라는 것을

삶으로 배웠다.  








다시 한번,
내가 손녀딸이라 간게 아니라


'어제. 그 상황에서.
그때 내 마음과 몸의 상태가 돌봄의 욕구가 컸었다'라는 설명이 훨씬 맞다.
그리고 여건도 잘 맞아떨어졌다.

도우미 이모님 마침 시간이 되셨고, 준이는 어린이집을 갔다.


나도 몸과 마음이 힘들 때는
남을 돌볼 욕구가 전혀 없어진다.
(오히려 학대 욕구가 커진다) 

여자고 딸이고 엄마고 간에
내 몸 하나 돌보기도 버거운 순간들 분명히 있다.

나는 남자아이도 아닌데
가끔 벽을 부수어버리고 싶거나
책을 찢어버리고 싶거나
발을 쿵쿵 구리며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 나에게 만약 누군가가

"넌 엄마니까 돌봄의 욕구가 크겠지?
그러니까 넌 애를 어떤 상황에도 잘 돌봐야지.
네가 돌봄의 욕구가 없을 때는
넌 죄책감을 느껴 마땅해.

그렇지 못할 때 넌 뭔가 문제가 있는거야.

넌 '여자고 딸'이니까 가족을 돌보는 역할이 맞고 어울려.
가족 중에 너밖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네?
고맙다.
넌 딸이고 여자니까 이런 걸 잘하는구나" 

라고 한다면  
그것보다 이것보다 더 큰 폭력이 있을까.

이것보다 더 내 진심을 오해하는 게 또 있을까.






4. 곳곳에 포진한 성별 프레임


남자아이, 여자아이




성별 프레임을 의식하고 나니
곳곳에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
준이에게 중고책을 사주려고 중고사이트에 들어갔다.

이런 문구가 종종 보인다.


"여자애가 한번 봐서 새책 수준이에요~"

'여자애가 봤다'는 건 자랑이다.  
깨끗하고 정갈하다는 뜻이다.
중고이지만 a+급이라는 거다.

이 딸아이 엄마는
'남자애가 쓴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적극 내세운다.


반면 '남자애'가 어떤 물건을 썼다는 사실은 중고시장에서 극비다.  
알려지면 상품성이 확~! 떨어질 일이다.
기는게  다.

그런데 가만있자...

'여자애는 책을 깨끗하게 본다?'


이것도 우리가 여자애에게 덮어 씌우는
'여자애 프레임'이지 않을까?

깨끗하게 책을 안 보는 여자애는 어쩌나?
그 아이를 주눅 들게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폭력의 언어일 수도?


나만해도 그렇다.

나는 책을 아주 더럽게 보는 여자까.



갑자기 다른 일도 떠오른다.
 
지금 살고 있던 전셋집을 계약할 때이다.
집주인이 당황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백일 된 남자애가 있다고요?
부동산에 남자애 있는 집 피해달라고 했는데..."

우리는 '남자애'를 데리고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 앞에서 비굴해져야 했다.

'앞으로 잘 단속하며 집을 깨끗하게 쓰겠다'라고 약속하며 굽신 굽실댔다.

'남자아이는 집을 망가뜨린다'


이것도 듣는 남자아이 매우 억울한 성별 프레임일 수 있다.






5. 나를 나로 봐주세요.


 
아들과 딸의 뇌는 다르다고 한다.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꽤나 설득력 있다.

그분들 왈
선천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아들에게는 보통 '이러저러한 욕구'가 크고,
딸에게는 아들과는 달리 보통 '요로조로한 욕구'가 크단다.


그래.
그거 인정한다.
 
인류를 위해 열심히 연구해주셔서 감사하다.

그렇다.
학자분들의 말처럼 내가 '여자'라
어떤 특정 욕구가 클 '수' 있다.
 
그런데 ''에 방점을 찍지 않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욕구를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한 사람의 어떤 '고정적인 특성'으로 볼 때,
(특히 '성별'로 이분법을 적용할 때)
나는 발에 전족이 채워지는 것처럼
내 존재가 묶이는 것을 느낀다.


어떤 팩트를,
존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확장의 도구'로 쓸 것인가?
그 존재를 좁은 틀에 가두는 '제한의 도구'로 쓸 것인가?

작지만 대단히 큰 차이다.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나의 여성성을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본적이 있나 싶다.
(아. 우리 남편이 있지...
갑자기 고마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금까지 사는 동안 '여성 프레임'은 무겁고 답답한 족쇄였다.


한편, 비폭력대화는 '현재'에 집중한다.



이 순간 당신 안에 생동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서로에게 묻는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당신을 당신으로 본다.

당신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딸이든 아들이든.
사위든 며느리든.
손녀든 손자든.

그런 건... 모르고~~

그저 당신을 당신으로 보고
당신 눈에 비친 나를 나로 본다.  

나부터 나를 제대로 나로 봐주고 싶다.
그게 출발점이지 싶다.


나에게 나직이 부탁해본다.  



"나를 나로 봐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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