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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Feb 05. 2021

관찰. 당신에겐 쉬운가요? (2021.0205)

비폭력대화(nvc)를 삶으로 살아내기 - 35화



1. 누가 내 칫솔을 쓴 게 분명해!


문제의 칫솔




어젯밤 이를 닦으려고 보니 내 칫솔에 물이 흥건히 묻어있다.

'방금 누가 쓴 게 분명해!'


갑자기 짜증이 확 난다.


'저번에도 새 칫솔을 꺼낼 때 하필이면 내 거랑 같은 색을 꺼내서 헷갈리게 하더니,
심지어 오늘은 헷갈려서 내 걸로 이 닦은 거야 지금?'

분노 게이지
20->40->70->100!!!!
출동!



물이 흥건한 분홍색 칫솔을 들고
남편이 누워있는 방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증거인멸의 소지가 있으니 서두른다)

아놔.
결혼하고 제일 황당한 것이
이 욕실 공동사용이다.


아니. 왜 수건을 쓰고서 밖으로 가지고 나갑니까?

아니... 왜 치약을 쓰고 가지고 나가십니까?

같이 쓰는 나.

안보이십니까?

아니.~~~~~~ 왜. 왜. 왜. 왜!!

코랑 귀 후빈 면봉을
바로 옆 미니 휴지통에 넣지를 못하십니까?
손가락 부러지셨습니까?

수건.
쓰려면 없다.
근데 욕실 바깥 사방에 널려있다.


치약.
쓰려면 없다.

'내 전용 치약'을 숨겨두었더니
그것도 캐비닛에서 찾아서 쓰고서 또 가지고 밖으로 나간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개선이 안돼서
(남편 왈 "난 정말 생각이 안 나~" 모르쇠 전법)
7년을 살고 나니
아쉽고 울화통 터지는 내가 자구책을 마련한다.


치약은 밧줄로 수건 줄에 묶고,
수건도 집게 두 개로 집고,
쓰고 난 면봉을 볼 때면 심호흡 몇 번 하고 그냥 내가 버려준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이제 내 칫솔까지 써?!!!!

크아 아아~~~ 못 참겠다~~~!!!



방에 들어서자,
그는 누워서 예능을 보며 너무 웃겨서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나는 분홍색 칫솔로 삿대질하며 외친다.


"내 분홍색 칫솔에 물이 묻어있어!!!!!!!!!!''







"난 아닌데???? 난 아냐~나 아까 엄마네서 닦고 왔잖아~내가 방금 샤워했는데 그때 그 칫솔에 물이 뿌려졌나 봐~"



잉??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도 봤다. 남편이 어머님 댁에서 이 닦는 거.



뭐야.......



순간 겸연쩍어진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화장실로 왔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다행이다. 관찰로 이야기해서'



첫마디를 "당신! 왜 내 것 건드리냐고!"로 시작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음 엄청 부끄러울 뻔했다.
 

관찰로 말을 시작하는 것은
훌륭한 대화를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최악의 대화는 피할 수 있다.

오호~

오늘도 관찰로 말한 것.  스스로 칭찬해~~

 




2. 부모 관찰 - 난이도 별 다섯 개




'아...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싶다.
아빠에 관한 기억은 1년 전부터만 빼고 완전히 삭제하고 싶다.
아빠를 완전히 새로 보고 싶다.
아빠를 그냥 옆집 아저씨. 지나가는 행인으로 보고 싶다.
아빠의 여자 친구처럼 1년 전쯤부터 아빠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면 훨씬 더 편안할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이유는
내 안에 아빠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엉켜있어서 도저히 아빠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 남이나 남편, 자녀를 관찰하는 것은
항상 잘되지는 않지만
아주 안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아빠를 관찰하는 것은 유난히 안된다.

자가진단을 해보자면
지금 나는 '아빠 관찰 불능' 상태다.

인정!

툭하면 비꼬며 '평가' '비난'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정말 싫고 지겹다.


"할아버지가 딸이 없어서
네가 딸 노릇 하느라 애쓴다"

이 말은 아빠 쪽에서는 '애쓴다'에 방점이 있는 건데

이 말을 들으면
내 안에는 온갖 기억과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럼 아빠가 하든가요'
'칫. 말만 하고 있네'
'딸이라서 뭐요!'



하아... 내가 봐도 중증이다...

나.. 어뜩해야 하나?



나는 정말 RESET 하고 싶다.
관찰로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





3. 관찰의 귀재


크리슈나무르티는
평가가 들어가지 않은 관찰은 인간 지성의 최고 형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폭력대화> 56p



여기서 말하는 최고의 인간 지성을 가진 놈이
우리 집에 산다!


'' 아빠는 이렇게 해주고~
(집에 있는 곰돌이 인형을 자기 목에 태우며)


끝 이래!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응? 뭐라고?''


'' 이렇게도 해주고
 (곰돌이 인형을 거꾸로 세우고 두 다리를 잡으며)

이래!'' 

아~~~~~~!

저 자세는 평소에 남편이 아들과 놀아줄 때 해주는 거다.

아빠가 집에 오면 준이는 맨날 저걸 해달라고 조른다.

지쳐 퇴근한 남편은 16킬로짜리 애를 목에 태웠다가~거꾸로 들며 헥헥거리다가
순전히 '살기 위해' 이런저런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다.


시작할 때부터 '두 번만 하고 끝이야'나
'이번이 끝이야'라고 신신당부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아빠를.
이 아이는 기가 막힌 '관찰'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 아빠는 나랑 놀기 싫은가 봐''도 아니고
''아빠는 맨날 힘들대''도 아니고
''아빠는 나에게 인색해''도 아니고


'' 아빠는 이런 이런 자세를 하고 끝 이래''

아직 아무 평가도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안 되는 부모 관찰을
얘는 식은 죽 먹기로 하네?




''오늘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물으면

''호재는 양상추를 '웩'했어.''

리얼하게 호재의 표정과 몸짓을 관찰하고서 보여준다.

''호재는 편식쟁이야''라거나
"호재는 선생님 말을 안 들어"라고 하지 않는다.



'' 어린이집에서 잘 잤어?'' 물으면

''호재는 자고
나는 '선생님 잠이 안 와요'라고 말하고~
연주는 ' 자장가~ 자장가~ 우리 아기 자장가~'라고 노래해''
라고 대답한다.

여기에도 평가는 한 톨도 없다.

나는 아이가 자야 할 시간에 안 자면
재우려고 오만 짓을 다해보다 짜증이 나서,
'하아... 얘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냐'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것도 평가였구나.

자기는 말을 안 들은 게 아니라 잠이 안온 거였단다.

 




사람들이 다 늙고 난 후에
인간 지성의 최고점에 닿겠다고
명상을 하고 수행을 떠나고 난리부르스인데

태어나서 몇 년 안된 아이는 지금 이미 최고점에 와있다.

우리도 유년시절.
관찰의 귀재였을 텐데.
그동안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간에 대한 연민이 올라온다.


이렇게 관찰의 귀재였던 우리가
어쩌다가 왜곡되고 뒤틀리고 고정된 부모상을 갖게 되는지.

일단 만들어져 뇌리에 박힌 그 상은  
얼마나 얼마나 수정되기가 힘든지.

때로는 덮어두고 평생 안 볼 것처럼 살아도 보고,
때로는 더 잘 살아보려고 애쓰며
심리치료 같은 것에 돈도 써보고
상담 공부, 마음공부, 이 공부 저 공부를 해봐도

부모와의 기억은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고
잊은 줄 알았는데 다시 떠오른다.

지구가 생긴 이래 가장 오래 생존하고 있다는 바퀴벌레처럼 그 명이 질기다.










4. 고맙다. 다행이다. 두렵다. 난감하다.



''아빠는 이렇게 하고 끝 이래''

혀 짧은 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설거지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일단은...
고맙다.

아직은 우리를 평가하지 않아 주어 고맙다.

평가할 의도도 생각도 없는 네가 고맙다.

이 보석 같은 시기를 지금
내가 내 아이와 보내고 있구나.

소중하다.


그리고 다행이다.

네가 우리를 미처 평가하지 못하는 나이에
비폭력대화를 배우며
내가 일상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
의식하고 살 수 있어 다행이다.


한편으로 두렵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처럼
네가 나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그 순간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 두렵다.


자녀의 평가가 이렇게나 두려
작 자녀인 나는 내 부모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있다.


이 모순이 심히 난감하다.





5. 우리. 이 순간을 누



준이가 "아빠는 끝 이래"라고 말하고 있을 때
잽싸게 동영상을 찍었다.

'귀엽지?'라는 말과 함께 남편에게 동영상을 전송했다.


그런데 퇴근한 남편이 평소와  좀 다르다?


오늘은 혼자 잘 놀고 있는 준이를 일부러 번쩍 들어 안는다.
 


우리 집 육아의 대원칙:
혼자 놀고 있는 애는 최장시간 놀도록 말도 걸지 않는다.


그는 어인일로 이 원칙을 깨고 있다.


''아빠가 목말 태워줄까?''



''야호~~ 신난다~''

아이는 깡충깡충 뛴다.

둘이 신나게 뒹군다.

뒹굴고 있는 부자를 보는데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다.



'여보~ 당신도 알지?
아빠에게 한번 더! 를 외치는 날도 곧 끝나.
나중에는 지 방에 처박혀서 안 나올 거라고.

우리 이 순간을 누려요.'





작년 여름의 네가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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