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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Mar 15. 2021

후회의 말들(2021.0314)

1.
비폭력대화를 배우며 가장 신선했던 숙제는
자기가 그날 하루 했던 말을
다 기록해보라는 것이었다.

'다요? 엄청 많이 말할 텐데?'

그런데 집에서 하는 말만 일단 기록해보니

- 생각보다 다양한 말을 하고 있지 않더라
- 특정 대상에게 한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하더라
-  자기만 모르고 가족은 이미 내가 매일 하는 말을 다 알더라
(특히 5세 아들은 억양과 리듬까지 묘사하더라!)





2.
"됐어~ 하지 마~ 줘!
안 할 거면 하지 마!"

오늘 남편한테 했던 말이다.


"야!!!!!!!!!!
안돼! 씁~! 이거는 진짜 안돼. 집안에서는 안돼."

아들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가 치우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너 진짜 하고 싶지. 우리 내일 나가서 하자"
 
중간 회유였는데 거절당함.
거절당하니 더 짜증남.
어설프고 안 하는 게 더 나았을 비폭력대화.


결국
"너!!!! 그러려면 나가서 너 혼자 해!
밖에서 하든 복도에서 하든!"
(현관문 열어젖히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름)

 
아이는 자기는 '진~~ 짜' '지금 당장'하고 싶단다.
'조심조심' 할 수 있단다.
엄마가 쉬고 싶고 치우기가 힘들다니까

자기가 하고 나서 깨끗하게  싹! 치울 거란다.

이 말도 안 되는 다섯 살의
근자감과 Nowism!



3.  
밤이 되니 후회가 된다.


남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난 자기의 도움을 받고 싶어. 도와줬으면 좋겠어~" 
였다.

격려받고 인정도 받고 싶었다.

"그냥 버려~ 얼마 한다고" 대신

"이거 붙여보려고 고생 좀 했겠네? 순간접착제도 사 오고"
이런 말이 듣고 싶었다.




아이한테는

" 너 정말 조각하고 싶지?
엄마는 이제 좀 쉬고 싶어.

하준이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엄마는 쉴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싶었다.

쳇...
솔까.
모르겠다.

애가 잘 시간 직전에
거실에서 스티로폼을 갈면서
동시에
내가 어떻게 쉴 수 있지?

하..
답 안 나옴.





서로의 욕구를 '모두' 충족할 때까지
시간을 들여 계속 대화하는'비폭력대화'가 초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짜증 난다.

'연결'이라는 가치를
내가 아이와 최우선 순위로 두느냐?
그러면 이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순간에도'
그런 식의 대화를 해볼 가치는 충분하지.

이걸 순간순간 기억하고 싶은데
바로바로 까먹는다.


결국, 눈물을 글썽이며 정말 하고 싶다고 표현하길래
절충안으로
'베란다에서만 하고 베란다에서 들어올 때 옷 다 벗고 들어올 것'으로 했는데

지가 치우기는 개뿔!
그 베란다 치우는 것만도 30분이 걸렸다.

내 옷과 얼굴에 계속 달라붙어서 나조차 옷을 벗어야 했다.
머리에 붙은 스티로폼 떼는 것도 5분은 걸렸다.




그런데 아이는 내복 바람에
추워서 딸꾹질을 하면서도
30분을 조각이란 걸 하더라.

'진짜 하고 싶었구나' 

하게 해 준 것은 후회가 안된다.

다만 그 짧은 순간에
협박하고, 안된다고 했는데 거절당하고, 회유하려다 또 거절당하고, 갈팡질팡하고, 소리 지르고, 다시 협상하며 어쩔 줄 몰라했던 내가 후회되고 짜증 난다.
아이 앞에서 다중인격자같이 보였을 내가 민망하다.
옆집에 우렁차게 들렸을 내 목소리도 부끄럽다.



4.

후회의 말들을 떠올리며
나를 보살핀다.


오전 10시에 나가서 하루 종일 밖에서 놀았다.
집에 와서는 정말 '쉬고만'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다.

하루에 할당된 에너지를 깡그리 불태우고  
이제 자기만 하면 된다.
목욕도 싹 시켜놨다.
그런데
택배 포장에서 나온 스티로폼을 보더니
조각을 하고 싶단다.

잘 준비를 다하고 안방에서 걸어 나오다가
거실 한가운데서
파리바게트 빵칼 두 개를 들고
스티로폼 조각에 심취한 아이를 목격했을 때

내가 옆집 엄마였으면
'어머나~~~~ 애가 어떻게 이렇게 창의적이야?

어쩜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분명하고 집중해서 해?'


하고 감탄했겠고

너그러운 우리 시엄니 같으면
' 우리 준이~ 이게 그렇게 재밌쪄?' 하며
볼을 비볐겠지만
 
정작 엄마인 나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이의 머리카락, 내복, 입술 할 것 없이
스티로폼 조각들이 들러붙어있다.

'저거 언제 떼고 언제 치우고 언제 자냐!'

봄철 민들레 씨가 사방으로 날리듯
거실에는 스티로폼 조각들이 춤을 춘다.

아이는 '조각'이라 주장했지만
실은 다진 마늘 제조하듯이 스티로폼을 갈고 있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

이거 실화냐?



집에 아이랑 둘이 있으면
아이의 재미와 나의 휴식이
정확히 반비례하는 순간이 '너무도' 많다.

오늘도 그랬다.

늘 이 문제로 씨름 중이다.

끝에는 '나만 씨름하나..'
의기소침해지는 것까지 늘 반복이다.
  

오늘 나에게도 토닥토닥이 절실히 필요하다.

'너... 그 순간 '휴식'이 너무 필요했구나?'

'그런데, 아이가 재밌어하는 것도 하게 해주고 싶었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너..
아이랑 정말 잘 연결되고 싶었구나?'
 
'응.. 나 그랬어...
나에게는
휴식,
아이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연결이 중요했어.'




5.


유유 출판사의 '말들' 시리즈를 좋아한다.

지금까지 다양한 '말들' 시리즈가 나왔다.

'도서관의 말들'
'습관의 말들'
'쓰기의 말들' 등등


'유유' 출판사의 말들 씨리즈



유유 출판사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오지랖도 넓게도
이 출판사의 다음번 책 제목을 구상해드린다.


모두가 공감할 제목.


'후회의 말들'

부제는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진심에 대하여'


내 친김에 만들어본 북카피



캬.. 멋지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후회하며 살까.
그리고
그 뒤에는 얼마나 많은 진심이 숨어 있.






베란다에서만 하게 했는데도
거실 어딘가에서 매일 스멀스멀 스티로폼 입자가 나온다.


그런데 상하게 그때 그 순간만큼 화나지 않다.

그냥 '스티로폼이 유리창 틀에 있구나'
관찰을 하고 있다.

그리고 '후회의 말들'을 떠올린다.
내 강렬했던 휴식의 욕구와 함께.


그리고 또,
아이의 재미존중한다는 게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지 각한다.





박멸하고 싶은 스티로폼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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