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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Mar 25. 2021

선생님. 제가 영어를 혼자 공부하는데요.

1.



종이 치고 나서도 교탁에 서서

일부러 좀 더 있다 나온다.


긴 시간은 아니고 30초?


애개...

겨우 30초.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누군가 꼭 필요한 이가 있겠지' 하고

매 시간마다 녹음기처럼 말해본다.


" 들었는데도 이해 안 되는 사람 이리 와~

너무 빨라서 다시 듣고 싶은 사람도 와~

물어볼 거 있으면 나 있을 때 지금 얼른 물어봐요~"



그러면 몇몇 애들이

쭈뼛쭈뼛 교탁 주위를 서성인다.

쉽사리 말을 뱉지는 못하고 그저 주위를 맴돈다.



무심한 듯 툭.

"뭔데~" 하고 찔러본다.


그러면 그제야

모기만 한 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선생님. 제가 영어를 혼자 공부하는데요. "


"선생님. 제가 영어 학원을 안 다니는데요."


"선생님. 제가 영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2.


아이들의 마음속에 수치심이 보인다.


잘하고 싶은데

도움받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는데

지원받고 싶은데

이것도 저것도 모르겠어서 오그라드는 그 마음.


언제부터 '영어학원을 안 다니는' 것이

이렇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되었을까.


'영어를 못하는 것'이 수치가 될 뿐 아니라

' 영어학원을 안 다니는 것'이 수치가 된 괴상한 풍조.



자투리 시간에 자습을 줘보면

아이들이 각종 영어학원에서 준 숙제를 붙들고 사투를 벌인다.


내가 봐도

참 실한 그 자료들.


각종 반의어 유의어 틀리기 쉬운 단어부터 출제유형, 변형 문제 완벽 정리하여

구워삶아서 애들 입에 넣어주고 있다.


돈을 주어야 얻을 수 있는 자체 제작 교재와 정보들.


그 풍경 앞에

이런 자료에 닿고 싶지만 닿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쪼그라든다.


출처: 동아싸이언스




3.

교사의 존재 이유를 모르겠을 때


밥벌이로서의 직업 말고

정말 이 직업이

이 사회와 아이들에게 필요한 직업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휘청할 때



어떤 선배가 툭.

해준 이야기를 기억해낸다.


"다 끌고 가려고 하지 말고

목표를 작게 잡아봐.

몇 명이라도 말이지.


생각보다 

인간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거든."



나는 교탁 주위를 서성이는 아이들에게서

내 존재 이유를 찾는다.


수능 영어는 중학교 때 끝냈다는 아이나,

학원에서 빠방 하게 모든 것을 준비시켜주는 아이는

비빌 언덕이 있다.


한편,

내 주위를 맴도는 아이들의 마음은

가난하고 절박하다.


너희의 눈과 마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눈과 마음의 높이를 너희에게 맞춰야 하겠다.


내 존재의 이유를

너희의 눈에서 찾아야 하겠다.


수업이 끝나고 잠시 머무는 그 시간.

일상의 아주 작지만 소중한 순간으로 여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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