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1~12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4:11/우리말)
요한일서 4장 전반부는 2개의 주장으로 나뉜다. 첫번째 주장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기는 커녕 적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요일4:3).
예수의 가현설은 초대교회 무렵 큰 화두였다. 절대신이 유한하고 죄성에 약한 인간의 몸으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일시 현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 형틀에서 제물로써 돌아가시고, 완벽한 죽음의 상태에 머물렀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부활함으로서 인간에게 죄사함과 화목의 길을 열었다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가현설은 매우 이단적이고 위험한 사상이었다. 심지어 당대의 많은 사람이 동조하고 동의했다. 시대적 입장과 매우 부합하는,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가현설은 초기 기독교 당시 세계적으로 융성했던 로마제국의 신관과 닮았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은 자주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해 사람들과 여러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제우스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아이를 임신시키기까지 했으니 빔프로젝터의 영상처럼 내려온 것이 아니라 육체의 감각이 분명한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보편적인 신관이던 시대에, 어쩌면 예수의 가현설은 당연한 시대적 추론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적 예수 논쟁은 20세기 들어서 큰 화두였다. 가현설과 달리 역사적 예수론은 예수의 인성을 인정하고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른다. 예수를 선지자, 사회운동가, 철학가 등으로 평가하고 그의 신적인 행적은 후대의 조작이거나 계승자들에 의한 과대과장이라고 보는 경향이라 알고 있다. 예수의 신성이 부정되면 그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예비한 인류를 위한 보속의 제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영웅적 최후에 불과하게 된다. 이 역시 기독교의 입장에선 매우 이단적이고 위험한 사상에 속한다. 자꾸 떨어져 가는 종교의 효능감과 더불어,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매우 명확한 선을 긋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주장의 힘이 막강한 것도 당연하다.
교회가 제아무리 가현설이 이단이다, 역사적 예수론은 이단적이다 외쳐봤자 소용없다. 그게 소용이 있었다면 지금 현존하는 수많은 이단, 사이비, 심지어 타종교는 이미 지구상에 사라지고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럴까. 오늘 본문의 후반절, 거기에서 해답을 찾아본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이 구절만 읽으면, 가현설을 주장하거나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는 이들이 미혹의 영에 지배받고 예수의 삼위일체 성자이심을 믿고 부활승천재림을 믿는 자는 진리의 영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진리의 영에 속한 자라는 확증은 이런 신학적 고백 외에 필수요소가 더 있다. 다음 절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마다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로서,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4:7/우리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 가현설, 양태론, 역사적 예수를 믿는 자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지 않는 자도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고 믿어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여느 이단보다 천국에 가깝지 못하다. 이쯤되면 오병이어에 눈이 돌아간 군중들의 우문(愚問)처럼, 한 가지 어리석은 질문이 머리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난 하나님 사랑하는데?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식구들도 사랑하는데?"
오늘 본문이 제시한 사랑은 그런 사랑과는 거리가 멀고도 멀다.
"사랑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This is love:),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요일4:10/우리말)
내 나름대로 완역하면 "이것이 (우리가 본받고 지녀야 할) 참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인 상태였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아들)를 제물로 삼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인류의 제물된 당사자이신 예수님도 사랑에 대하여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세리라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형제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방 사람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마5:43~47/우리말)
나와 같은 편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아니다. 나와 친한 사람이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같은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도 나도 같은 숨을 쉬고 같은 물을 먹고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 그들의 밤에도 달이 빛나고 나의 새벽에도 별이 아롱인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동일하게 대하고 계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는 나와 내 편의 사람들만 위해서 죽음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내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나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들 모두를 위해서 그 죽음을 택하신 것이다.
아파도 사랑하자. 나의 하나님이 반복된 배신과 원망을 들으시면서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데, 나의 예수님이 배신과 조롱과 의심을 당하시면서도 십자가에 오르셨는데, 나도 사랑하자. 사랑해야 하나님의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될 수는 없으니 그들의 허물과 죄,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이라도 용서하자. 하나님은 나같은 죄인에게도 대속의 은혜를 베푸셨으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사람에게나 같은 눈길로 바라보자. 하나님이 내 죄를 생각하고 쌍심지를 키셨다면 나는 사랑은 커녕 예수의 도에 대해 전혀 깨닫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18~19세기에 기독교가 제국의 함선을 타고 세계로 퍼져 나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 기독교가 뿌리 내리게 된 것은 자본이나 기술이나 제국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밀알의 삶을 산 선교사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슴에 창끝을 꽂는 순간에도 방아쇠를 차마 당기지 못한 사람들, 열악한 선교지에서 몇명이고 자녀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사람들, 병자들을 위해 아무도 모르는 오지에서 묵묵히 인생을 바친 사람들... 그런 이들의 손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져 왔다. 장차 최후의 심판대 뒤에서 소리를 높일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그들이 아니면 누구일까. 예수의 사랑을 자기 삶으로 증거한 이들이야말로 그럴 권리가 있다.
사랑은 마침내 열매가 된다. 사랑하면 아프게 된다. 내어주고 신경쓰고 귀 기울이고 달려가고 도와주고 대신 짊어지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걱정이 없는 사랑이 있긴 한데 그건 우상숭배다. 인플루언서를 사랑하는 대중의 마음처럼 가볍고 책임없고 그래서 열매도 없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랑과는 거리가 참 먼 것 같다.
아파도 사랑하자. 그들의 밤에도 달이 빛나고 나의 새벽에도 별이 아롱인다. 예수의 사랑을 자기 삶으로 증거한 이들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열매를 오늘에 맺을 수 있다. 열매는 사역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