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묵상일기

사랑하게 도우소서

요한일서 4:13-21

by 디모츄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4:21/우리말)


신자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지할 수 있는 이유는,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일4:13).

성령이 그들 안에 들어오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했기 때문이다(요일4:15).

신자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사랑으로 행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자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음도 받아들이는 행위다(요일4:10,15).


요한일서는 '예수가 행한 그 사랑'을 본 받아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4:11/우리말)


더 나아가, 그 사랑이 보이지 않는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아니라고 한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일4:20/우리말)


삶이 신앙을 증명한다. 야고보서에도 비슷한 논조가 잘 나와있고 사도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형제 사랑에 대해 여러번 설파했다.


그런데 다른 말을 하면서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잘못된 삼단논법같은 건데, 이런 거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 신자는 사랑한다 - 고로, 사랑하고 있는 나는 신자이다]


하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예수를 시인한 신자는 아니다. 타종교인들도 이웃을 위해 내어주고 헌신하고 용서한다. 종교가 없는 이들도 그러하다. 세상 모든 사람들도 사랑을 한다. 크기와 형태와 방향을 차치하고,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사랑이란 것을 한다.


그러나 신자된 사람의 사랑이란 것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동기부여가 된 사랑이다. 원래 기질이 선하고 동정심이 많았던 사람이 있다 치자. 그의 삶이 신앙을 갖기 전후가 별반 다르지 않더라도 동기부여의 원천이 무엇인가 살펴보면 그가 신자로서 세상을 사랑하는지, 기질과 학습에 의해 사랑하는 것인지 스스로 알아챌 수 있다.


내가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말 중 하나가 있다. "저렇게 착하니까 교회를 다니지."

나의 선한 행동이 그리스도를 빛이라 드러내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가득했던 청년시절이었는데, 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착하니까 교회 다닌다는 말이나, 사랑하니까 천국 갈 수 있다는 말이나 매한가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예수를 주님이라 시인하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 그것은 주님이 기억하고 갚아주신다는 것도 분명하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제자라는 이유로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마10:42/우리말)


마태복음 25장에는 더 확장적인 비유가 나온다. 최후의 심판날이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처럼 두 부류로 나눌 것이다. 양무리에 속한 이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리 와서 세상의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마련해 두신 나라를 상속하라.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맞아들였다.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주었다."(마25:34~36/우리말)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묻는 그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우리말)


반대편에 있는(염소로 분류된) 자들에겐 마귀와 함께 영원한 불지옥에 들어갈 것을 명한다(마25:41). 이처럼 악인은 영원한 벌에 들어가고, 의인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리라 예수는 말씀했다(마25:46). 심판대 앞에서 재판자에게 공대를 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있겠느냐만, 이 예화에 나오는 의인과 악인 모두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전제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도 신앙은 전제되어 있다. 이 예화에 등장하는 3명의 사람인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은 종교적 위치가 두드러지게 다른 이들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지도자 그룹이다. 명실상부한 신앙인 혹은 사역자를 대표한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혼혈잡족이라 비난받고, 반쪽짜리 신앙을 가진 천하고 더러운 것들로 매도된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수가성 여인의 일화에서 보듯이 그들도 믿음에 목마르고 하나님을 갈구하는 이들이 있기는 매한가지다. 세 사람 모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하는 사람들이다. 사마리아인을 굳이 비신앙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형제사랑을 언급한 야고보서도 그 자체가 뭇 교회들과 교회 안의 지체들을 향해 쓰여진 편지이니,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지만 축복이 하나님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사랑에 대해 참으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 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기인한 이유로 하는 사랑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보여지는 형태와 모습, 결과는 비슷해 보여도.


사랑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다고 그분이 만들어 놓은 나라에 갈 거란 생각은 말자. 그분과 일면식도 없고, 친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분이 사는 집에 초대될 것이며, 나아가 그분과 영원히 그 집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하나님은 괜찮을지 몰라도 외려 그 사람이 얼마 못 견디고 말 걸. 그들은 아마도,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도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이들과 같은 곳에 가거나, 그들의 신이 만들어 놓은 다른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혹은 비종교인이 상상하는 어떤 사후세계에 가게 되거나. 아니면 그저 흙으로 돌아가거나.


오늘 하루 예수의 이름으로 말씀을 펴고 시간을 연다. 나의 긴 묵상은 사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는 그분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 내가 써 놓은 긴 글 마디마디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여호와를 하나님이라 부르는 이들의 삶에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바램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아... 돌고돌아 결국 내 얘기로구나. 오늘도 나는 선택해야 한다. 염소가 되어 살 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 혹은 물 한그릇이라도 베푸는 이가 되어 살 것인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삶이어야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도 그렇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그렇다.


오늘 하루, 잘 해낼 수 있을까. 성령님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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