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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와 영화 '디 아워스'

by 안녕스폰지밥

펜 끝에서 갈라져 나온 세상과 마주치다

-「버지니아 울프」전기와 「울프 단편소설 전집」, 영화 '디아워스(The Hours.2003)'


'스물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게다가 정신병이 있고.. 작가도 아니고...'


버지니아가 언니 버네서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있던 담담한 자기 고백이다.

20세기 초를 살았던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그녀는 소설로 영화로, 여성을 사랑한 여성으로 현대에까지 인상을 남기고 있다.


페미니스트 작가로 첫 인식을 하게 되었던 나에게 ‘버지니아’란 이름은 딱딱하고 거리감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어려움'은 10대 시절 보게 된 ‘올란도’란 영화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에서 200년을 남자로, 다시 200년을 여자로 살아 간 한 인물을 대면하고 나면 대부분 같은 반응이리라 본다.

여성에 대한 시대와 사회의 편견을 알렸고, 양성에 대한 포용력을 갖춘 중성적인 여인이 주연을 맡고 있다는 것을 통해 어린 시절에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주제, 그렇지만 결코 나와 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그때에는 왜 그리 졸리고 지루한 담론이던지..

그래도 대학 수업을 통해 여성학의 텍스트로서 두세 번 정도 이 영화를 더 접하고 나서야

‘올란도’란 허구의 인물이 갖는 신비함, 그리고 그 인물을 그려낸 버지니아 울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언니 버네서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듯 스스로를 열등의식에 묶어 두고 있지만

그녀에 관한 전기와 영화를 통해 문학에 대한, 삶에 대한 열정이

하늘을 삼킬 만큼 검푸르게 일렁이는 파도로, 또한 마른 의식의 모래를 적시는 해일의 힘으로도 느껴지고 있다.

그래, 그녀는 바다와 같은 사람으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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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를 통해 보이는 것은 결국 버지니아의 축약된 삶의 모습이다.

그래도 겹쳐진 삶의 주름을 잠깐씩 펴볼 수 있는 작품들의 시퀀스를 통해 그녀를 둘러싼 몇 가지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은 여성과 사회의 관계다.

민감한 머리와 가슴으로 글쓰기에 쏟아내던 그녀의 특별함은, 결국 사회가 인식하는 그리하라 정의 내린 ‘여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막히곤 한다.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예민하며, 감성적이고 자신의 이성을 냉철히 주장하는데 여린 사람’으로서의 어린 시절. 조금이라도 잘못 만지면 금이 갈 듯 얇고 투명한 유리를 품고 있다는 점.

버지니아가 지닌 천성은, 그녀가 살던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성’과 맞물린 톱니바퀴와 같았다.


성평등에 대한 인식개선으로 여성의 권리와 자유가 현시대에 좀 더 주어졌다 해도

과거에 묶인 고정관념과 편견의 사슬들이 아직도 몸을 조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뿐만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진 여성 스스로 몸의 장애물들이 완전 해체되는 것에 두려움을 앓고 있기도 하다.

버지니아도 그랬다. 그녀도 나약해 보였다.

살롱의 사교 모임에서 가벼운 대화를 즐기고 집안일을 돕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그러나 뿌리가 땅속을 더 깊이 뚫고 뻗어가며 나무 기둥과 가지를 흔들 때가 왔을 때

피하지 않았기에 그저 그런 소녀가 되지 않았던 거라 생각한다.

그 흔들림에 반응하고 태양을 바라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기에

오빠인 토비가 중심이 된 토론 모임 ‘블룸즈버리 클럽’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이성을 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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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녀를 통해 사람 간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가부장이던 아버지 레슬리.

그리고 그와 대가족의 일을 책임지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던 어머니 줄리아.

버지니아는 아버지 레슬리의 남성 권위 하에서, 연약한 여성의 지위를 인지하며 잔잔한 반항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한편으로 순간을 위해 항상 부지런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살았던 어머니 줄리아를 통해 동경하는 여성상을 인식하게 된다.

아버지의 권위는 버지니아에게 여성에 대한 전근대적 억압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일깨움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긍정적이면서도 순응하는 삶의 태도가 버지니아에게 자연스러운 동경의 대상이면서,

여성에게 맡겨진 가부장체계하의 짐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리라 본다.

그래서 젊은 날의 어머니의 죽음은, 버지니아에게 살갗이 벗겨질 듯 쓰리고 아픈 것이었으며 소중한 것의 부재였다.

평생에 걸쳐 타인과의 관계에서 슬픔과 행복의 저울추가 상하 운동을 반복하며 균형점을 찾아가듯이

버지니아에게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은 그러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편식이 불가능한 식단과 같다.


글쎄, 어쩌면 버지니아의 삶은, 고뇌와 번민 속에서 예술혼을 달래는 여타의 작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녀의 전기 또한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여타의 범인(凡人) 보다 월등하게 극적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헛된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불운한 가정사를 겪고도 절망을 몰랐던 낙관주의 자였다거나

사랑하는 사람 없이 지옥 같은 혼돈 속에서도 완성된 삶을 이룬 이였다면…

범접할 수 없는 ‘신화’의 주인공은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속에 소중한 작품을 일구어낼 틈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드러내고, 채우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기에 부족함을 보듬어 주려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 이들로 인해 인상적인 작품들을 낳은 것이라 믿는다.


바로 그러한 사람 중 하나인 남편 레너드가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벼랑 끝에 벗어 놓은 신발처럼 처연하기만 했을지 모른다.

가장 원하던 일에 함께 관심을 가져주고 그녀가 무얼 해야 하는지, 마음의 병을 어떻게 쓰다듬어야 하는지 알고 있던 타인의 존재로 인해 버지니아는 그만큼의 빛과 가치를 더 얻게 된다.

레너드는 그녀가 정신질환이 심해져 점점 더 고통받기 시작했을 때 작품활동을 계속하게끔 이끈 원동력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그의 간호방법은

그녀를 부드럽게 그리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스스로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워지는 과정’이다.

자연은 솔직하고 편안하다. 흐름에 스스로를 맡겼을 때 내 속의 울림이 느껴지고, 그것이 외벽에 부딪쳐 다시금 메아리칠 때 진실을 보게 된다.

그 진실, 버지니아 자신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보듬어 주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진실. 그것의 인정이 그녀를 ‘자연’으로 이끌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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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버지니아에겐 자연스러움과 열정이라는, 두면을 통합하는 과제가 주어진 듯하다.

민들레의 홀씨처럼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수성이 어느 바람과 만나 어떤 땅에 정착하느냐가

항상 그녀를 불안하게 하면서도, 또한 깨어있게 하는 힘이었다.

의식의 흐름을 담는 방식으로 소설을 써 내려가는 펜 끝 잉크자국은

그렇게 바람 따라 몸을 맡긴 민들레 홀씨의 정착점일 것이다.


이렇듯 자아와 열정의 관계로 이끄는 바람을 느낀다.

문학과 예술에 깨어있게 하는 열정의 근원지는 자연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 본다.

여성에게 교육이 주어지지 않던 현실 속에서, 언니 버네서와 이루었던 작지만 가치 있는 일들이

매일 조금씩 그녀를 자신 안의 문학 속으로 이끌었듯이.

자연스러움을 찾는 것, 지키는 것은 안타깝게도 잘 지켜지지 않고, 부자연스러울 때가 대부분이다.

인간이 자연에 부합하는 절대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말이다.

그래도 다시금 각성하며 자연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연과 부(不) 자연은 다시금 평형점을 찾는다.

그녀에 대한 관심은 한 편의 영화, 여성학의 텍스트를 거쳐 전기에서, 결국 작품으로 안착한다.

‘문학 작가’였던 그녀를 알기 위해, 결국 급류를 올라 본향에 이르는 송어와 같은 경로를 따르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그리운 사람」이라는 단편 소설 전집을 대하고 있으면

자의식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펜을 움직이던 버지니아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다.

대학 교양 수업으로 들으려던 소설 창작론 강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담아

단편집 속 울프가 그려 놓은 마음을, 자연을 따르는 그 흐름을 좇고자 했던 기억이 있다.

일부에서는 버지니아가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지 못하고 자의식에 전념하며 예술 지상주의의 선봉에만 머물렀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게도 단편집을 읽으며 얻은 느낌들 중에, 그런 의견이 담길 여지가 있을듯하다.

중상류층 ‘안주인’들의 티타임에서 이루어지는 가벼운 대화를 연상케 하는 일상적 소재들이 때로는 따분하게 느껴졌으니.

그러나 그 일상적 소재가 ‘종이 뭉치’가 아닌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지함과 섬세함을 담는 작업으로 인함이다. 소품 속에서 끝없는 상상력과 의식의 흐름을 나풀거리듯 펼쳐 보이는 버지니아의 글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 또 다른 관념과 만나게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누군가는 운명을 이야기하곤 한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품에 안고 세상 문을 연다. 햇빛을 받으며 찬란하게 걷고 있는 순간에도 등 뒤 그림자는 머문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쓰다듬어 주는 과정이 결국 숨 쉬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양과 음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이렇듯 ‘운명론’에 머문다.

그러나 그 이상, 그 이하도 사람은 운명에 머무르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때 파란 우울이 마음 한 구석에서 미지근하게 찰랑거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도 결국 생(生)과 사(死)를 품고 맨살로 세상을 보았고

정신적 고통만큼이나 큰, 삶의 환희와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감으로 채워진 날들을 보았다.

예술가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후대의 범인(凡人)들에 의해 신화화되는 도구가 되어 왔다.

버지니아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것은 그녀가 당대의 페미니즘 작가라는 사실과 함께, 인상적인 예술가로 인식되는 도구와 같다.

그러나 운명은 아니다. 자유의지였으며, 스스로 거기까지의 삶을 택한 것이다.

남성들의 모임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어린 소녀로 머물지 않으려는 버지니아가 있었고

문학 속에서 자의식을 찾아가던 버지니아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정신적 고통에 의해서든, 그 무엇이든 간에 죽음마저도 스스로 택한 버지니아였기에

더욱 강렬한 음영대비 속에 그녀의 빛이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세월의 흐름 따라 몸이 커가고, 나이를 먹지만

마음속에 각자 어린 시절 소년, 소녀를 품고 있다.

몸과 나이의 성숙에 반해, 크지 않는 자신 안의 소년, 소녀와 만날 때

심장이 땅 아래로 내려앉는 듯한 좌절과 슬픔 또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그 존재로 인해 아직 우리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고, 열정의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버지니아가 자신 안의 풍부한 감수성으로 고통받던 소녀이면서, 아름다운 작가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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