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이끌고 갈 수 있다면
좋은 거겠지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건 어쩌면
프로그램화된 기계적 삶일지도
몰라
무의식의 공간,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저 심연의 깊은 공간과
의식의 힘겨운 싸움
그 속에서
피어날 수밖에 없는
불안한 자아
어쩌면 이건 숙명일 거야
인간이라는 숙명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결국 사상가들의 가르침을 아무리 펼쳐 봐도 그 끝에서 마주하는 질문은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반복되는 질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내 정신의 명령을 받아 적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프로이드의 말처럼 저 심연의 끝자리에 잠겨있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의 종자가 있어서 윤회를 거듭하면서 내면에 담겨있는 자아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가장 쉽게 독선에 빠지는 오류 중의 하나가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알고 통제할 수 있다는 커다란 착각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결코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진단하고 그에 알맞은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이성의 명령을 받아 순응할 수 있는 영역과 이성의 명령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늘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기에 이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순간도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는 자신의 통제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통제 밖에서 자신도 모른 채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석가모니는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설법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에는 고정된 것이 없다고 봤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의 사슬 속에서 돌고 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것은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을 수 없고 놔준다고 해도 놔줄 수가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마음은 우리의 자아의식의 영역 밖에서 더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데 정말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알 수는 있을까? 타인으로부터 억압받거나 흔들리지 않는 참된 나를 찾아서 그 모습대로살아간다는 것이가능할까?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양면성처럼 선과 악이 교차하는 인간의 두 얼굴 속에 무엇이 자신의 참된 모습인지를 파악하고 그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맹자의 성선설처럼인, 의, 예, 지의 덕목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순수한 본성이고 이러한 본성만 잘 발현하면 우린 누구나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목격되는이중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단순하게 욕구, 욕망을 닦는 수행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만 할까? 만약 그렇다면 결국 선의 본성, 선의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서질 수 있는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닐까?이런 신기루 같은 존재를 두고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단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은단순한 소망이 아닐까?
그러면 순자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선한 도덕성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기적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악한 존재일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돋아나는 사랑의 마음, 눈물, 공감의 어루만짐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석을 내려야만 할까? 우리가 하는 행동은 늘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선한 행동도 있다. 즉, 슬픈 자를 봤을 때 흐르는 눈물의 의미는 순자의 본성론에서는 더는 설명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규정하고자 하면 규정할수록 더욱더 멀어지는 나는 누구인가?
이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불교에서는 팔정도의 수행법을 제시한다. 늘 바른 것을 보고(정견), 늘 바른 생각을 하며(정사), 늘 바른 말을 하고(정어), 늘 바른 행위를 하며(정업), 늘 바른 직업을 갖고(정명),늘 바르게 수행하고(정정진), 늘 바르게 기억하고(정념), 늘 바르게 참선해야(정정)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수행을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일치하여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적 자유로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끊임없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결과인 것인가? 그러면 정말 팔정도를 꾸준히 실천하면 어느 순간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조화롭게 통합되어 늘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는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경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열반, 해탈이라고 부르는 그 경지는 평범한 범인이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고달프고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면 실존주의의 가르침처럼 죽음의 문턱으로 달려가 보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통해 실존의 의미를 자각할 수 있다고 봤다.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의 공포와 두려움을 초대해 삶이 곧 마감할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순간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정말 순수한 의식의 세계 속에서 무의식과 교감하여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당장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단 하루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가정이지만 그 가정을 되도록 철저하게 현실의 문 앞에 내던져 보면, 똑딱똑딱 흘러가던 무의미한 시침의 소리가 갑자기 증폭기의 울림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60초라는 그 지겹던 시간이 마치 하루하루의 귀한 보석이 되어 심장을 뛰게 만든다. 죽음 앞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직면한 순간들을 더없이 소중하게 만드는 최고의 선물이자, 최악의 고통이다. 따라서 우린 죽음이라는 최악의 고통을 최고의 선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죽음을 곁에 두고 죽음이 전하는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다.’라는 말처럼 어제 죽은 이에게 오늘 하루는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하루이다. 지금 당신과 나는 그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삶을 늘 이렇게 긴박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삶의 대부분은 아마도 유의미한 의미로 가득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가정은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곁에 있지 않은 죽음을 곁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은 부단한 노력과 성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이에 맞는 환경이 당신 앞에 주어져야만 가능하다.
간혹 하루하루를 좀 더 열정적이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수없이 최면을 걸듯 오늘 하루밖에 시간이 없는 것처럼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해 보지만 이러한 맹세는 얼마 못 가 복잡한 현실 속에서 금세 무너지고 만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나다운 삶인가? 보다 쉽게 나를 규정해 줄 수 있는 사상은 없을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답은 멀어지고
고민만 깊어져
책을 덮고
길을 나선다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꽃도 보고 흙도 밟아보고
긴 호흡으로
당신의 숨결을
마음속에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