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사이
균형을 잃지 않고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내 품 안에
온전하게 담기 위해서
지금 내 마음은
무슨 준비를 해야만 할까?
나는 관계 속에서 규정된 채 그 관계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사슬적 자아인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삶의 빛깔을 빛내며 살아갈 수 있는 독자적 존재인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관계 속의 나를 파악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관계를 끊고 독립된 자아를 파악해야만 하는가?
만약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우린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이 둘 사이에서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만 할까?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타자와 관계없이 오직 자유인으로만 살 수는 없다. 내가 살아가는 곳곳엔 내 삶을 규정하는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린 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규정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 법칙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린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펼치면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빛낼 수 있는 삶을 지향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답변은 절대 타자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되고 스스로가 찾아야만 한다. 자신의 고뇌와 성찰에 의해 나라는 존재를 찾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자와 조화된 내 삶의 진정한 빛깔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타자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가치와 삶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삶은 결국 그 누구도 포용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그러한 삶은 이중적 삶의 실타래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낙오자가 될 뿐이다.
나를 찾아가는 일은 아주 어릴 적부터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도 참다운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내 모습을 찾은 적은 없다. 다만, 짧은 순간 외적 환경 및 내적 강제에 의해 규정된 모습에 만족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상황은 늘 변하고 변화된 환경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우린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본래의 모습을 잃고 포기하는 법을 깨달으며 주변의 환경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주술을 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늘 외롭고 공허하다.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무언가가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자신의 삶을 짓누르게 만드는 것이다.
새벽녘 잠이 깨 빈 거실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그러한 헤맴이 잠을 못 자는 것만큼 두렵고 무의미해질 때면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따라 밖으로 나간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넓은 공간에 서서 빈 공백과 투명한 나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곳엔 오롯한 내면이 드리우게 된다. 그러나 순백의 자아가 낯설다. 아니, 두렵고 무섭다. 뭔가 모르게 밀물처럼 스며드는 끈적끈적한 공허함과 외로움이 자신의 빈 모습과 마주하는 것을 두렵게만 만든다.
독일철학의 거장, 칸트는 철학의 중심 주제를 다음 세 가지 물음에서 찾았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이 물음은 곧 자아 찾기의 주제와 연결된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질문은 위와 같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에 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루에도 쉼 없이 변하는 마음의 물결과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의식의 현상을 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성, 취미, 특기, 가치관, 정체성과 같은 추상적 용어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고 싶어 하지만 이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정말 나다운 내 삶을 규정해 주는 것인지에 대해 우린 늘궁금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좀 쉬운 길은 없을까?
어디서부터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야 내 의식 속에 감추어진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있을까?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의식의 종자와 같은 것이 내 마음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만약 그렇다면 자아 찾기는 영원히 비밀의 수수께끼로 묻혀가야만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윤회의 사슬 속에서 돌고 도는 의식의 종자를 이성적 사유능력으로 아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 찾기에 대한 답변은 절대 형이상학적이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인식의 문제를 지나치게 관념으로 이끌고 갈 경우 이에 대한 답변은 결국 추상적 일반화에 머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상적 질문일수록 구체화, 현실화의 문제에 집중해야 그 안에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는 답을 찾을 수가 있다.
그럼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올까? 그러나 타자에게 인식된 거울 자아로서의 나는 결국 그들의 가치관 속에 함몰되어 있다. 그들이 말하는 나는 결코 내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비친 내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백 명에게 물어보면 백 명 모두 나에 대한 모습과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인간이 이타적 인간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고, 이타적 인간이 누군가에게는 이기적 인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신의 삶을 규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부심, 자긍심이라는 말은 타인으로부터 가져와서는 안 된다. 내 삶의 자긍심은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의해서 도출되어야만 참된 자긍심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타자의 시선은 늘 유동적이고 자신의 가치에 따라 변하는 물결과 같다. 따라서 특정한 타인의 시선에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함몰시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러한 타인의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주어지는 수많은 타인의 평가를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야만 할까?
사회적, 관계적 존재로서의 삶 가운데 타인의 시선과 평가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아무리 내면의 자아가 잘 발달 되어 있을지라도 타인으로부터 지나치게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자아에 대한 자긍심 또한 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대해 어디까지 의미를 두고 어느 부분에서는 과감히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이 중도(中道)의 길일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기계도 아닌 인간이 그러한 의식 작용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마음의 지각, 인식, 흐름 등은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어쩔 땐 내 기억 속에 ‘삭제하기’ 버튼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랄 때도 있다. 이제 그만 좀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스물 스물 돋아나 몸과 마음을 지쳐가게 할 때면 더욱더 이러한 바람이 간절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없이 직면하게 되는 타인의 시선, 평가, 굴레, 사슬을 어떻게 가늠하며 살아가야만 할까?
타인의 시선이 내 삶의 굴레가 아닌 내 삶의 디딤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면 자아가 잘 발달 되어 있어야만 한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줄 내면 거울이 없을 경우, 그 모습은 늘 타인에 의해 규정된 외면거울에 의해 종속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만 매우 소중한 길이다. 이 길을 알아야지만 우린 다른 사람의 내면 자아도 존중하면서 삐걱거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일까? 수천 년 동안 ‘고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대부분의 명저(名著)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어떻게하면 내면 자아를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그의 글에서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그분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가슴은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코리반테스 신도들이 신들렸을 때마다 훨씬 더 빨리 뛰게 되고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네. 아울러 나는 다른 많은 사람도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된다네.”
소크라테스는 내면 자아를 찾기 위한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서 반성적 성찰을 통한 무지의 자각을 주장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내면세계에 잠들어 있는 참된 자아를 깨우고 그러한 자아로부터 세상을 바라보아야 덕을 쌓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자각을 깨우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문답법을 통해서 아테네 청년들이 단순한 물음의 고민에 그치지 않고 그 물음을 계속해서 되씹으며 이성이 인도하는 순수한 자아의 문턱 앞에 도달하게 했지만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좀처럼 그 길을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길에 대한 가치 또한 쉽게 깨닫지 못한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고 고민하는 청년에게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기에 앞서서 ‘너는 어떠한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생각하라고. 그리고 그 가치를 찾게 되면, 하나하나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묻는다. 예를 들어 권력이 삶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 그 권력이 왜 삶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권력이 가치 있는 이유가 보편적 이성의 기준에 봤을 때 당신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가치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이렇듯 소크라테스는 고민하는 아테네 청년들에게 삶의 정답을 말하지 않고 끊임없이 삶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민을 통해서 계속 자신을 성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참된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자아 찾기의 방법은불교에서 말하는 ‘간화선’의 방법과도 비슷한 수행법이라고 볼 수 있다. 간화선이란 불교의 선(禪) 수행 방법 중 화두(話頭)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 속에 담겨있는 숨겨진 의미를 찾아 계속해서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것이 간화선이다. 다소 엉뚱한 행위 같지만 그 엉뚱한 행위 속에 담겨있는 순백의 마음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법을 따르다 보면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자각을 통한 깨달음처럼 어느 순간 참된 내면의 나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참된 내면의 나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와 불교의 간화선을 통해서 알고자 했던 순백의 나, 텅 빈 나란 무엇일까? 어쩌면 이에 대한 답변은 물음을 던지는 순간 이미 모순을 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텅 빈 나에 대한 답변은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정신의 영역, 영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린 그 보이지 않는 영혼의 범주를 잠시나마 언어를 빌려 포장할 수 있을 뿐이다.
김수환 추기경 님의 어린 시절 삶의 고민과 환경 등을 다룬 ‘저 산 너머’라는영화를 보면, 추기경 님이 ‘내 마음의 씨앗’이 궁금해 신부님에게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김수환 추기경님 : 신부님, 내 마음의 씨앗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신부님 : 내 마음 속엔 세 가지 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남이 아는 내가 있고,
두 번째는 자기가 아는 내가 있으며,
세 번째는 자기도 모르는 내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 자기도 모르는 나를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신부님 : 그건 천주님께서 알려주실 것입니다.
늘 나에 대한 평가는
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떠한 사람인지
늘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평가한다
그 말과 평가에
나도 모르게
자신을 그런 나로 규정해
버린 채
내면 자아에 대한 성찰을
닫아 버린다
그리고 한 평생을 타인에 의해
길들어진 외면 자아의
거울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