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과
생존의 사슬이 전하는
불협화음 속
힘겹게
돋아나는
너의 그림자가
깊어만 간다
나를 분석하는 것은 쉽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쉽다. 그러나 누구나 스스로를 분석할 수는 없으며 그 분석이 내면의 울림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쉽고도 어려운 질문 앞에 수많은 철학자가 온 생애를 걸고 탐구해 왔지만, 그 누구도 ‘당신은 누구이며 이런 사람이니, 이렇게 살면 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삶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작은 나침반 하나 정도 손에 쥐여 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나침반이라는 것도 결국은 타자의 생각에 불과하다. 답은 없다. 결국 그 무엇도 우리 삶을 규정해 줄 수는 없다. 우린 다만 그러할 것이라는 위로와 안심(安心) 속에서 잠시 누군가의 길 앞에 의지할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린 이처럼 힘든 의식의 작업을 해야만 할까? 그냥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바로 내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걸어가면 안 되는 것일까? 바람이 불어오면 부는 대로, 강물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어쩌면 이러한 발걸음이 가장 나다운 내면의 발걸음이 아닐까?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얽매인 틀 속에 맞추어서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누구나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자 삶의 큰 소망이다. 그러나 우린 그런 삶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마음의 길을 따라가는 삶을 살지 못한다.
이유가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 낸‘거울 자아’때문이다. 우린 항상 내 모습을 바라보고 나를 평가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에 비친 나의 모습에만 너무 집중하며 살아간다. 염치, 체면, 배려 등 아름답고 성스러운 말들로 포장된 교육과 훈육이 일평생의 삶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배려 잘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등의 구속이 자신의 삶을 잊은 채 멋지게 포장하는 데에만 삶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우린 늘 이러한 거울 자아에 구속당한 채 삶의 대부분을 소비한다. 그러면서 삶의 방향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나 아닌 타자의 삶에 의지한 채, 마치 그 삶이 최선인 것처럼 정신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거울 자아에 갇혀 사는 사람은 외적인 모습은 빛나고 화려할지는 몰라도 내면의 모습은 무기력하거나 어둑하게 잠겨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늘 기쁨과 슬픔의 기준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있다. 따라서 그는 슬픔이 오면 자신의 삶에 대해 분노하듯이 강한 불평만 가득 쏟아낸다. 또한, 기쁨이 찾아와도 그 기쁨의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찾지 못하고 타자에게 의존하게 된다. 내가 기쁠 때 타인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행복할 때 나도 기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굴레 속에서 삶의 긴긴 여행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거울 자아에 길들어진 사람이야말로 주변을 잘 이해하고 배려하는 매우 따뜻하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울 자아에 길들어진 사람은 언젠가 내면의 갈등과 불일치, 혼란으로 결국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들게 된다. 눈치, 체면을 바탕으로 한 타자와의 관계는 지속적 만남의 장을 형성할 수 없고 단지 일시적 거울에 비친 관계만을 나타내 줄 뿐이기에 이러한 사람과의 만남은 때때로 부정적 결말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거울 자아는 어려서부터 잘못된 가정교육에 의해 무자비한 방식으로 주입된다. 또한 긴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잘못된 학교 교육에 의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빼앗아 버린다. 가정에서의 유교적 가치관, 부모의 잘못된 거울, 사회 구조적 연결고리 등이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거울 자아에 송두리째 저당 잡혀 살아가도록 강제화시키는 것이다.
모델링, 덕 교육, 위인전 독습, 위대한 사람의 찬양과 존경 등이 자신의 가치를 찾고 자아를 탐색하기에 앞서 무조건적으로 누군가를 추종하고 따라가는 데에만 열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모습을 찾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모델링하는 것이 아니라 모델링을 먼저 주입하고 가르치면 결국 그 사람을 닮아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누구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린 모두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개성, 삶의 목표와 방향을 지닌 독자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린 사랑이라는 잘못된 교육에 휩싸여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대로 누군가를 모델링하거나 인격화시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아이들의 성장의 밑거름인 가정과 학교에서 이러한 교육의 문제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부모는 늘 부모의 생각과 가치관에 빗대거나 잘난 옆집에 사는 누군가의 삶을 동경하면서 자신의 자녀가 그들의 소망대로 살아가 주기를 바란다. 학교는 이러한 교육의 연장선 속에서 모범생이라는 특정 거울을 가지고 모든 학생을 일률적으로 줄 세우는 데 집중하면서 소수의 승자를 위해 다수의 패자를 양산해 낸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더는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묻지 못하고 조금씩 부정적 자아를 확립하게 되면서 거울 자아만을 가슴에 품은 채 나 아닌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의 저 끝머리에서 황혼의 노을이 희미하게 빛바래져 갈 무렵, 거울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속에 나는 없고 다른 무수한 사람들의 표정, 관심, 기대만이 빼곡하게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의 이력서라는 것이 결국은 누구의 관심과 기대, 책임을 얼마만큼 잘 수행 했는지에 의해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러한 거울 자아에 길들어진 삶에 대해 말한다.
“하나의 큰일이 우리를 죽이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실망하는 게 무서워서 거절하지 못한 수천 개의 작은 의무가 우리를 죽게 한다.”
길옆에
이정표는
너무도 곱고 다정하게
잘 피어나는데
진정 내 마음의
이정표는
피기도 전에 내 마음속에서
사라진다
너무 많은 이정표가
곳곳에
삶의 정답이라는 이름으로
널려 있지만
진정 그 어떤 안내도
내 마음 속
꽃 한 송이 제대로 피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