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무서운 것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는
잡념, 공상, 허상 등이
자기의 의식 속에서
영혼의 일부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일정 부분은
비정상적이고
누구나 일정 부분은
불안하고
힘들다
따라서 무의식이 가져다주는
흔들림,
그 깊은 생의 슬픔이란
어쩌면 당신과 나의
공감을 꽃 피우기 위한
신의 아픈 선물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나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선의 본능보다는 악의 본능이 더욱더 강하게 솟구쳐 오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멋진 말과 화려한 언어로 윤리와 도덕을 말하고 있지만, 말하는 순간순간마다 내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통제할 수 없는 악의 숨결이 꿈틀거리고 있다. 가끔은 십자가의 힘을 빌려서, 또 가끔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또 가끔은 저 끝머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양심을 통해서 악의 숨결을 통제하고 조절하지만, 악은 늘 내 안에서 나와 동행하며 손짓한다.
‘어서 오라. 내게로.’
악의 길을 가는 것은 선의 길을 가는 것보다 매우 쉽다. 그리고 빠르게 습관화되어 악의 습성에 중독된다. 나쁜 일이라는 것은 처음이 어렵지 한번 하고 나면 그것은 때때로 자기 합리화의 그늘에 묻혀 너무나 쉽게 자행된다. 그런데 더욱더 심각한 것은 악의 그늘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선의 본성이 사라져 악한 행동을 하고도 그것이 악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뻔뻔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더욱더 무시하고 짓밟으며 공감과 동정의 마음을 허락하지 않고 자기의 본능과 욕구만 보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기게스의 반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당신에게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드는 반지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 반지를 끼고 선행을 하겠는가? 아니면, 악행을 하겠는가? 아마 많은 사람은 익명성이라는 감투가 주어진다면 악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기게스 또한 반지가 주어진 순간 욕구와 욕망에 불타올라 자신이 사모하던 왕비를 간통하고 칸다울레스왕을 암살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리디아의 왕이 된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법과 도덕 같은 규범을 만들고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처럼 언제 솟아오를지 모를 악한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악한 행동은 선한 행동 보다 더 쉽게 발생한다. 그러나 우린 가끔 주변에서 벌어지는 악한 행동을 접할 때면 너도나도 앞서서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도덕적 군자가 된 것처럼 인정사정없이 비판하게 된다. 물론 악한 행동을 한 자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윤리적, 종교적으로도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을 하기에 앞서 그 행동 앞에 무섭게 비판의 감정을 내던지는 이유가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있을지도 모를 악의 본성을 애써 감추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 때문이라면 상당히 당황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악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린 늘 악이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언제 악의 모습이 내 안에서 표출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악은 분노의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투영될 수도 있고 계획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 심층 저변에서 끊임없이 돋아나 의식의 흐름을 방해한다. 우리가 흔히 잡념, 공상,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변두리에 위치한 악의 일종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무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때때로 무의식에 의식의 상당 부분을 빼앗길 경우, 현대의학은 정신장애라는 진단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종종 의식보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무의식은 이성의 통제 밖에서 합리성을 잃어버린 채 결핍된 감성으로 응집되어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폭발할지 모른다.
총을 보면 군인을 생각하고 전쟁 중 정당한 싸움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 이성의 울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총을 통해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살인이라는 도구를 기억하게 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자기의 의식과 상관없이 잠재되어 있는 무서운 공포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이러한 무의식의 물결을 의식 밖으로 잘못 꺼내게 될 경우,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 있는 무서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의 본능을 지녔을지라도 이러한 악의 본능이 의식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당위적 의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란 어쩌면 축복이기 보다는 저주의 가능성이 먼저 우리 앞에 드리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의식의 세계는 이성의 바깥에서 형성되기에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무의식의 세계를 잘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악의 본능은 잠재된 억압과 통제, 분노와 일탈의 감정, 관계의 뒤틀림 등 복잡한 요인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선과 악의 숨결을 저장하게 되는 곳이다. 따라서 우린 의식의 세계를 이성적으로 단속하는 데에만 너무 긴긴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무의식의 세계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을 관리하고 지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어떤 무의식의 종자가 우리의 내면 속에 깊게 각인되어 활동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간의 발달단계를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의 과정으로 분류하면서 각 단계에서 겪게 되는 쾌락 추구의 불만 및 과다한 만족으로 심리적 측면에서 고착화 현상이 발생한다고 봤다. 이러한 고착화 현상이 한 개인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평생을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의 일부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이드의 논리는 특정 의식과 결핍된 일부의 행동만을 설명해 줄 뿐 관계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전(全)의식을 모두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점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내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의식의 거울과 무의식의 숨결이 함께 하고 있다. 분명 의식의 거울은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면서 사랑을 말하고 배려를 외치며 공감을 중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의식의 끝자리 저 희미하게 돋아나는 무의식의 숨결이 구름 속을 헤집고 다가오듯 끊임없이 판단의 합리성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많은 사람이 불안장애, 강박장애, 공황장애 등에 시달리고 있다. 직장, 학교, 교회 등 많은 집단 시설 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사람들은 늘 적지 않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누군가와 정신없이 눈빛을 마주 보며 웃다가도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눈빛에 두려움을 느끼며 상대방과의 심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만나는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대화하는 시간은 늘어만 가는데 이상하게도 공허함과 외로움은 커져만 간다. 서로의 관계와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합리적 의식의 거리는 좁아지고 있으나, 온전하게 자신의 내면을 투영할 수 있는 무의식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각자도생이라는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만남에서조차 합리적 이익 관계에 따른 의식적 만남만을 중요한 수단의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아무런 이득과 목적 없이 더불어 어울릴 수 있는 무의식적 관계의 상실은 갈수록 증폭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면서 무의식과의 불편한 만남을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결국 정신적 불안함의 증세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외로움이 가져다주는 텅 빈 공허함을 본인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로움은 절대 감추거나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당신의 외로움이 힘들 듯 우린 모두 외로움 앞에 깊은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외로움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참된 너와 내가 진실 된 만남으로 외로움의 속내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단절된 공동체 속에서 이러한 만남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집단 경쟁 심리가 작용하는 직장이나 모임 등에서는 더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심리를 타자에게 강하게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 투사는 곧 험담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두 명 이상이 모이면 본인의 이야기가 싫증 날 무렵 타자의 이야기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타자를 향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칭찬이 아니라 질책과 비난이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다른 누군가를 향해 질책과 비난을 즐겁게 나누는 것은 그 속에 거부하고 싶은 본인의 부정적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자신의 내면 속에 담겨진 ‘조금 괜찮은 자기’를 보게 되면서 심적 안정화를 이루게 된다. 본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주고받을 때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평온함을 타자의 험담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정신이 부서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진실한 소통의 부재(不在) 때문이다. 하루 24시간, 입과 귀를 통해 주고받는 그 수많은 대화 가운데 마음 속 순백의 위로로 다가오는 이야기는 얼마나 될까? 역설적이지만 막힌 가슴을 치유하는 제삼자적 효과로서 타인에 대한 험담과 공유된 감정이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어쩌면 사람들은 답답한 본인의 가슴을 표현하기 위해 타자를 끌어들여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그토록 타인의 험담에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은 결과적으로 더 큰 불화와 아픔을 가져다 주게 된다. 타인의 험담은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고 관계의 악화를 초래하게 되며 진실 된 만남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린 되도록 곁에 있는 누군가를 통해 자기의 내면자아를 비추고 그 모습 속에서 서로의 영혼을 부둥켜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에 거짓이 없어야만 한다. 아무리 경쟁과 갈등, 억압된 현실이 서로의 눈빛을 투명하게 볼 수 없도록 할지라도 서로의 마음을 온전하게 안아줄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타자의 외로움을 나의 외로움으로 부둥켜안고, 나의 외로움을 타자가 깊이 안아줄 것이라는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될 때 우리 내면에 있는 부끄러운 무의식도 자연적으로 누군가를 향해 말할 수 있게 된다. 무의식은 의식 밖으로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의식과의 조율을 통해 이성의 통제를 잘 받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무의식을 계속 내면 속에 꼭꼭 가두어둬야만 할 때 무의식은 어느 순간 폭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폭발의 현상은 때때로 자기도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될 수도 있다.
무의식 또한 의식의 영역만큼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우린 모두 누구나 이러한 무의식의 고통 속에 휩싸여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동반자를 찾아 인생의 긴 여행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행복과 불행은 의식의 확장보다는 무의식의 어루만짐 속에서 꽃피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온전하게 감싸 안아주면서 토닥토닥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순백의 영혼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는 내가 선택하거나 판단하거나 자율적으로 행위하여 나타난 어둠이 아니다. 무의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부할 수 없는 주변의 환경, 성장배경, 관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수십 년에 걸쳐 의식의 깊은 곳에 쌓여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의식의 그늘 때문에 슬퍼하거나 자신의 자존감을 훼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모두 우린 그런 무의식의 아픔을 가지고 이 순간을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감추고 싶은 무의식이 존재하듯 상대방도 그런 아픔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치유책은 서로의 무의식 앞에 깊은 배려와 위로를 전하는 것뿐이다.
내가 외롭듯, 주변의 상대방도 외롭다. 내가 힘들 듯, 주변의 상대방도 외롭다. 이 단순한 사실을 즉시 한다면 너와 내가 함께 해야 한다는 그 본질적 가치의 의미를 비로소 찾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끊임없이 악은 내게 말한다.
‘어서 오라. 내게로.’
아이들의 눈빛과 아내의 눈빛, 부모님의 눈빛이 악을 짓누르며, 다시 이성의 강한 울림을 기다린다.
눈을 뜨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우린 늘 불안하다
언제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이 부닥쳐
깨어진 말과 행동으로
표류할지
마음의 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행동과
네 행동의 대부분은
어쩌면
우리가 모두 의식하지 못하는
다른 무엇 때문에
끊임없이 발생하고
소멸하는지 알 수가
없어
늘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