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상황 앞에서

by 문객

죽음이라는

완전한 소멸이

소멸이 아니라

완전한 삶이라는

또 다른

삶으로 회귀할 수 있다면

그것처럼

설레고 행복한 일이

지상에

또 있을까?



235호, 병실을 찾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암은 주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암환자를 곁에서 바라보며 그와 함께 죽음의 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생의 많은 부분을 철저하게 구속시킨다.


사형선고, 살아갈 날의 정해짐, 불안, 두려움, 분노, 포기, 눈물, 마지막 포옹으로 이어지는 짧은 날의 생의 몸부림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때때로 순간순간은 고통과 절망, 희망 등이 복잡하게 지탱하고 있는 위험한 사다리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죽음의 날짜가 정해져 있다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무엇을 해도, 어떠한 희망을 가져 봐도 늘 죽음의 날짜가 주는 두려움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 죽는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질서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숙명적 질서의 순환 고리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주변의 누군가가 내 곁에서 영원히 사라져 간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는 쉽게 인식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감성적, 지각적으로 이러한 단절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습관처럼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흔적들을 지운다는 것은 그것을 함께 해온 시간만큼이나 오랜 아픔의 시간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정해진 병실의 숨결은 마치 통하지 않는 바람의 소리처럼 들린다. 뭔가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가쁜 호흡이 모든 병실을 가득 채우면서 떠나야 하는 고통과 떠나보내지 못하는 아픔이 출렁거린다. 그러다가 순간순간 찾아오는 옆 동지의 사망선고가 있는 날이면 어느새 짧은 생의 순간이 더욱더 짧아진 것처럼 다가오게 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지속되게 된다.



지나고 보면 삶이라는 것이 한 장의 일기장처럼 순간의 기록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순간순간은 늘 복잡하고 답답한 일상들이 얽혀져 좀처럼 삶의 환희와 기쁨을 전해 주지 못하는 답답함이 지속된다. 그래서 우린 늘 짧은 생의 울렁거림 속에서 힘겨운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영숙 할머니께서 어젯밤 떠나셨다. 가족 중 누군가는 바쁜 일상에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연락이 되지 못해 몇몇의 자식만을 옆에 두고 마지막 눈을 감으셨다. 사람의 감각 기관 중에 호흡이 멈추는 마지막까지 기능을 할 수 있는 부분 중의 하나가 청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족들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머니의 귀에 대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아무런 감각이 없을 것 같은 감은 눈 곁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할머니는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생에서의 마지막 호흡을 마무리하며 생을 마감했다.



암 병동의 일상은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죽음을 자주 접하다 보면 어느새 죽음도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마치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계절의 변화처럼 삶 앞에 조금씩 죽음이라는 자연적 변화의 과정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암 병동을 오래 지킨 사람일수록 죽음의 순간 앞에 덤덤해지게 된다.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더없이 힘든 일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숙명의 과정이다. 따라서 죽음 앞에 맹목적으로 슬퍼하기에 앞서 죽음을 대하는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가져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가치관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죽음 앞에 막연하게 둥둥거리는 슬픔을 안고 생의 많은 부분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보낼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는 죽음이 주는 현실적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음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가 깨달은 바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순간적인 자연의 변화에 불과하며 세상의 모든 것에 어떠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삶과 죽음이라는 것 또한 연기의 사슬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가면서 만나고 겪고 소유하는 것들에 대해 집착하고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어차피 영원히 내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연기의 사슬 속에서 돌고 도는 것이기에 결국은 변화하는 존재, 변화하는 현상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석가모니처럼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몸소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결말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인식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더라도 그 인식을 넘어 실천적 차원에서 깨달음의 삶을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생이 다하는 그 날까지 막연한 소망에 그치고 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인식과 상관없이 삶의 대부분을 습관, 관계, 감정 등에 저당 잡혀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의 세상, 천당이라는 곳에 의지해 볼까?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나타나 인간들을 향해 너희들이 궁금한 것 한 가지에 대해 답변을 해 주겠다고 하면 그 질문은 아마도 ‘죽음 이후의 세상이 정말 존재하는가?’가 될 것이다.



신앙심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와 세계에 다가간다는 것은 일정한 제약이 있다. 무엇보다 감각은 인식의 근원으로서 정립되기에 보이지 않는 관념의 질서와 세계를 무조건 확신하라는 것은 어쩌면 주관적 신념의 강요일지도 모른다. 신에 대한 믿음이 잘 형성되어 있어 신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세계를 확신하게 된다면 죽음은 어쩌면 플라톤의 말처럼 육체의 탈을 벗어 던지고 저 멀리 이데아로 회귀하는 멋진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이 잘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죽음은 그저 영원한 소멸일 뿐이다.


신이 그립지만 신을 믿을 수 없는 답답함이 더욱더 죽음을 두렵고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파스칼은 ‘도박사 논증’을 통해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합리적 선택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내기를 걸고 교리에 맞게 사는 것이라고 봤다. 즉, 정말 죽어보니 신이 없다면 신이 없다고 산 경우와 신이 있다고 산 경우 모두 평등하지만, 만약 신이 사후세계에 존재하게 된다면 신이 있다는 것에 내기를 건 사람은 천당이라는 영원한 행복에 다다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스칼의 논증 또한 단순하게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린 이러한 합리성 보다 감각적 경험을 통해 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한다.


중세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확증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결핍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을 갖게 된다면 어느 순간 삶의 한 가운데서 신의 존재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봤다. 실존적 삶의 극한 상황에 머물다 보면 가끔 영혼의 음성이 들린다.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지속되다 어느 날 창밖에 비치는 빨간 십자가 앞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릴 때가 있다. 이 순간을 신과의 만남이라도 해야 할지, 아니면 무한한 존재에 대한 단순한 염원 내지 소망이라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하고 유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린 늘 완전한 그 무엇인가를 동경하고, 그 안에서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믿음의 영역이라고 봤다.



교부철학의 뒤를 이어 스콜라철학을 체계화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이 지닌 한계점을 극복하고 신앙과 이성은 신의 두 모습으로 이 둘 간의 조화를 통해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아퀴나스는 신앙 너머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신의 존재 원리로 제시했던 논증의 방법은 그저 단순한 합리화의 차원에 머물고 만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것이 일정한 질서를 향해 움직인다는 것은, 부동의 동자로서 최초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최초의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 방법은 동양의 사상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학설이 바로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이기론이라는 구조를 바탕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했다. 즉 천리로서의 이치, 섭리가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사물에 들어가 있고 그 이치에 따라 본연의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가사상에서는 ‘도(道)’라는 자연의 원리, 섭리를 토대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움직임에 대해서 설명한다. 차이가 있다면 아퀴나스는 그 최초의 존재를 절대적인 인격신으로 본 것이고 동양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존재를 천리, 도(道)와 같은 표현으로 제시하게 된 것이다.



수천 년을 통해 동·서양의 수많은 학자는 그들이 가진 인지적, 직관적 능력을 총동원해 이 세상의 근원과 존재의 원리 및 내세에 대해 알고자 했으며 이러한 궁금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진행 중이다. 그러나 철학, 과학, 수학 모든 영역을 통틀어 객관화된 진리와 답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존재할 수가 없을 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으로 완전한 세계의 모습을 알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과학이라는 객관적 학문을 토대로 진리의 영역에 접근해 보려고 하지만, 과학이라는 영역 자체가 밝혀냈고, 밝힐 수 있는 범위 또한 극히 제한적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할지라도 과학이 해명할 수 있는 영역은 우주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적 범위로 봤을 때 우주의 끝은 수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은하계의 거리가 10만 광년이라고 하는데, 이 거리는 빛의 속도로 10만 년 동안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은하계가 또 우주 공간에 수십억 개가 존재한다고 하니, 우주의 신비를 알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신경과학과 뇌 과학 등이 아무리 발전하고 인간의 모든 유전자에 대한 정보를 가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유기적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생명체를 하나하나 조작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이득에 앞서서 더 많은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과학은 다만 편리한 생활을 위한 작은 수단에 불과하다. 과학이 인간과 우주의 모든 비밀을 결코 완벽하게 다 말해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궁금하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의 비밀이 궁금한 것이다.



이러한 무궁한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는 절대적 인격신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신앙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한계점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인류가 찾아낸 것 중에 신앙만큼 보이지 않는 존재와 영혼의 세계에 대해 답변을 제시해 주는 것은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종교는 어쩌면 인간이 인류에 존속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종교가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지구상에 인간이 소멸한 직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절대적 소멸을 항상 몸에 지닌 채 살아가야 하고, 이러한 소멸은 이성적 존재에게 더없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은 결국 인간 이상의 존재만이 답을 전해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만큼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죽음이 있어 어쩌면 유한한 생이 더욱더 빛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한한 생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한한 삶보다 어쩌면 더 큰 비극이 인간 앞에 도사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한성이 담보된 생(生)의 문턱 앞에서 어떻게 하면 한 번 뿐인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사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만, 그 죽음에 대한 성찰과 간접적 경험은 어쩌면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향한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정재영 작가는 ‘삶의 끝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인간은 최후의 순간에 최선의 존재가 된다. 죽음을 마주한 사람은 돌연 성장한다. 지금껏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만큼 갑자기 현명해지고 용감해진다. 최대치로 따뜻하고 부드러워지는 것도 삶의 끝에서다.”



이러한 죽음의 한계상황이 늘 하루하루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면 분명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순간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 모든 것을

다 이룬다 해도

죽음은 한순간에 이 모든 것들을

다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

그만큼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대상이다

따라서 실존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는 죽음이 전하는

또 다른 의미 앞에

가치를 찾아떠나는

노력을 지속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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