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말처럼
가슴 설레는 단어는
없지만,
진정
무엇이 정의로운 행동이고
정의로운 몸짓인지에 대한
순수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고
각자의 욕망에
저당 잡힌
정의만 존재할 뿐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자 욕구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만 누구나가 이러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동력제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좋은 사람, 좋은 이웃, 좋은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관심사이지만 막상 본인이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자아는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우린 늘 대의(大義)를 향해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전해주는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그리움은 자기의 내면에 담긴 동경의 욕구이자 그리움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나가 선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선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희생하기를 요구한다면 우린 아무리 그것이 선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그 길을 가지 못한다. 이러한 욕구는 선에 대한 지향 욕구보다 더욱더 격렬하고 간절하다. 이러한 심리 때문에 우린 본인과 다르게 살신성인의 자세로 봉사활동을 하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대의를 위해 사는 사람 앞에 경의와 존경의 마음을 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마음의 결정체가 증폭되어 나타나는 곳이 정치적 공간이다. 정치라는 것은 본래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응집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갈등과 마찰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는 단순하게 사회를 바르게 하는 것을 넘어 권력, 물질 등의 욕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정치적 공간 속에서 바른길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권력과 물질의 향방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속성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다.
수많은 시민운동가도 막상 정치적 권력을 손에 쥐게 되는 순간 권력이 손짓하는 부와 권좌의 늪에 빠지게 된다. 권력은 달콤하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지배 욕구를 분출하게 만든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권력은 그것을 소유한 모든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봤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그것을 사용하고 싶고 그다음에는 그것을 남용하고 싶은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봤다. 심지어 영국 사상가 토마스 홉스는 “권력을 쉬지 않고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이러한 권력 욕구는 오직 죽어서만 멈춘다.”라고 봤다.
이러한 속성 때문일까? 정치를 하면 할수록 정치인들은 더욱더 권력화되어 가면서 정의라는 순수한 지향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정치가 지향하는 바는 정의이지만 정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부와 권력과 같은 욕망의 충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는 이러한 부, 권력을 얻는 데 있어서 정당화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논리를 부정하고 싶겠지만 정치라는 공간 속에서 이러한 관계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치인의 삶은 어렵고 힘들며 존경받기 어려운 것이다. 진정으로 바른 정치를 하기 원한다면 정치에 맞서는 저항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권력은 거대권력에 맞서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정의를 외치던 순수권력도 결국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패권 권력의 늪으로 빠질 위험성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가 정의로운 삶을 원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정의로운 제도와 법을 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만들어지는 법과 정책은 이러한 정의로움의 요건을 충분히 충족하지 못한 채 다른 누군가의 비판의 화살이 되어 표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권력을 쥔 자의 판단 속에 머물고 있는 권좌의 달콤함과 그 달콤함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권력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결국 강자의 이익에 불과한 것이라고 봤다. 즉 힘이 있는 자가 그들의 권력과 힘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기본 관념을 정의라고 본 것이다.
아무리 정의로운 몸짓일지라도 그것이 힘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부정의가 되지만, 아무리 부정의한 것일지라도 큰 힘을 얻으면 세상에 가장 정의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를 들여다보면 애초부터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의란 결국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그들의 권력을 합리화, 지속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일지도 모른다.
역사가 강자의 역사이듯이 정의도 결국 강자의 정의인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등식이 깨질 때도 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결집되어 소수의 잘못된 권력자들보다 더 높은 힘을 발휘할 때이다. 이것이 바로 저항이고 투쟁이다. 이러한 저항과 투쟁은 권력의 고착화 현상에 따라 썩을 대로 썩어버린 문제를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해 욕망과 결탁하지 않는 순수한 정의적 관점으로 부당한 권력을 심판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적 저항은 권력의 고착화 현상을 막기 위해 언제나 늘 우리 곁에 존재해야만 한다. 권력의 속성이 늘 본인의 입맛에 따라 정의를 강자의 논리대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다수의 시민적 저항에 의해 내려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린 늘 사회에 관심을 갖고 바람직한 사회를 추구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정의로운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야만 한다. 권력이 시민의 힘으로 재편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순수정의가 꽃피우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그 권력은 권력의 늪에 빠져 잘못된 권력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권력자들이 되도록 경각심을 지닌 채 권좌 위에 앉아있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에 서 있다고 봤다. 무엇이 정의로운 기준임을 알면서도 그 기준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은 권력의 늪 속에 기생하는 또 다른 악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저항하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갈 때 최소한 정치는 우리 모두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한 번이라도 더 묻게 되고 이러한 성찰로부터 바른 정치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저항의 방법은 반드시 평화적인 수단과 방법을 전제해야만 한다. 폭력적 저항은 결코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더 큰 권력 속에 어두운 정의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잘못된 부정의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화적 방법을 통한 힘의 결집을 통해 개선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글 속에서 등장하는 초인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니체의 말처럼 도덕과 종교라는 것은 초인들이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포장된 개념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양심을 질병으로 표현했다. 기독교나 기존의 도덕이 노동을 찬양하고 양심적인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데, 그 이유가 지배층이 일하고 싶지 않은데, 노동은 있어야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리고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법 앞에 순응적인 사람이 된다고 봤다. 결국 이러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욕구라면 니체는 결국 우린 모두 초인의 삶을 지향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니체의 지적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합리적인 분석은 했을지 몰라도 그것이 사회의 발전과 공동체에 건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욕구, 욕망에 대해 사실적 분석을 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벗어나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가치, 규범에 대해서는 당위적 가치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완장을 차는 순간 삶은 욕구, 욕망의 힘과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욕망에 휩싸인 인간은 쾌락과 동반해 생기는 삶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정치에 몸을 맡긴 사람은 쉽게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꿈틀거리는 그 속에는 반드시 갈등과 대립, 정복이 존재하게 된다. 너를 이기지 못하면 내 욕망을 더는 충족시킬 수 없다는 무서운 야욕이 드리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의는 갈 곳을 잃게 되고 욕구,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서의 정치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사회적 약자들의 가난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누군가의 가슴에는 이 시대의 순수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게 하는 따스한 바람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권력을 향한 차가운 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 정의(正義)라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큰 권력 안에 정의라는 두 글자가 묻혀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바른 이름의 정의로 다시 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내 말이 법이 되고 내 행동이 누군가의 지침이 된다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법과 행동에 너무 깃들여지다 보면 어느새 다른 누군가의 법과 행동이 나의 모든 것을 조여 올 날이 반드시 오게 된다. 권력 속의 나는 결국 거울자아와 같은 현상이 보여주는 욕망의 응집체로서의 나인 것이다.
정치적 권력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욕망 충족의
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러한 권력이
인간화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러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너와 나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