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기가 있다는 것은
곧 부와 권력과
직결되는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대중성은
작품성 보다
늘 빠르게
많은 것들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욕구 속에 담겨진 가장 절실한 소망이다. 우리는 잊혀짐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에 대해 그 어떤 것보다 심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의 관심은 잠들어 있던 영혼을 깨우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관심을 받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곧 내 삶이 존재한다는 근거이자 열정의 증폭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타자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각인은 언제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렬한 각인조차도 오래가지 못해 결국 자기중심화의 논리에 묻혀 아무런 의미 없이 잊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습성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타자를 통해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그 확인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적 선택의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결국 타자를 향한 스스로의 존재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대중성은 밀려오는 물결처럼 일시적 효과만 전한다. 그리고 대중성의 본질은 자아의 가치에 있기보다는 표피적 감정에 살짝 얹혀진 뜬구름처럼 잠시 공유하는 감각적 쾌락에 머물고 마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성은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고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곳에 스며들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수시로 지배하고 있다. 유행, 트렌드, 통념적 가치라는 명칭 등으로 대중성은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만 하고 따라야만 하는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러한 대중성에 길들어지면 길들어질수록 어딘지 모를 외로움과 소외감은 더욱더 깊어만 간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공유하는 트렌드를 쫓고, 같은 옷을 입고, 맛있다는 밥을 먹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여행을 하는 데 공허함은 깊어만 가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물건, 똑같은 생각, 똑같은 취미 등은 점점 늘어만 가는데, 이상하게 ‘나’는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사상은 대중성과 결탁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경제성과 효율성은 결국 얼마만큼 더 대중성에 가까이 다가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질서는 되도록 표준화된 대중성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며 따라오도록 하는데 거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진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면받는 상품은 마치 쓰레기 같은 존재로 취급받게 된다. 아무리 가치 있는 상품일지라도 대중들이 그 상품을 소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 가치를 지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가치를 묻기 전에 대중성을 먼저 따지게 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힘겹게 책을 쓰고 수많은 출판사에 출간 의뢰 여부를 묻다 보면 하나같이 돌아오는 진실 된 답변은‘당신의 책은 시장성과 대중성이 떨어져 우리 출판사에서는 출간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작품성이 떨어져서,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 출판을 못한다면 공감이라도 할텐데 대중성과 시장성‘이 부족해 안 된다는 말 앞에는 이상하게도 깊은 공허함이 밀려오게 된다. 물론, 출판사도 결국은 이윤을 남겨야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 예술의 영역만큼은 시장성과 효율성을 벗어났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작품의 가치를 묻지도 않고 구매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대중성이 뛰어난 인물이 쓴 책이라면 너도나도 책 앞에 머뭇거린다. 각종 온라인 매체에서는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 대중의 시선을 잡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광고를 한다. 그러다 하나 둘씩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 순간 대중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것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예술인들도 이제 더는 자본주의 시장 논리와 4차 산업혁명의 파도를 외면할 수 없어 대중성과의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인터넷 매체를 통해 본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노래를 하고,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있다. 때때로 이러한 절박함은 ‘공감, 좋아요, 이웃추가’등에 작품의 가치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 논리는 결국 우리의 삶 근원에까지 스며들어 삶의 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중적 가치를 얻기 위해 자기를 포장하고 꾸미고 좀 더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대중들 곁으로 다가간다. 자기의 본질은 숨긴 채 대중이 의식하는 좀 더 멋진 조각인형을 꿈꾸며 생의 많은 시간을 자본주의가 뿌려놓은 상업화의 그늘에 맞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화장을 하고, 남들이 멋있다고 평가하는 옷을 입고, 되도록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게 자기의 모습을 포장하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이 보장되지 않는 인간의 행위를 전부 무용지물로 여기게 만드는 무서운 습성이 그 안에 숨겨져 있다. 아무리 멋지게 무엇을 해봐도 본인이 하고 있는 그 일이 막상 경제적 생산성이라는 수치로 드러나지 않을 경우 ‘쓸데없는 곳에 너무 시간 쓰는 거 아냐’라는 답변으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가사노동이다. 가사노동은 직장에서 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사회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좀처럼 이러한 가사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존중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하게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치관 차이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가사노동이라는 것이 직장노동처럼 현금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가사노동 자체가 현금화만 될 수 있다면 우린 지금처럼 그렇게 가사노동의 가치를 경시하거나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페미니즘 운동의 핵심적 분야 중 하나가 바로 가사노동의 분담이다. 가사노동은 더는 여성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는 우리도 모르게 자본주의의 생산성과 효율성에 따른 직업적 서열 구조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만약 생산성과 효율성, 자본화가 사회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안정화, 연대화, 공동화라는 가치가 중심 가치가 되어간다면 가사노동의 가치가 지금처럼 무시 받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를 얼마나 더 손에 쥘 수 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평가받게 된다. 결국 돈의 논리에 따라 가치가 지배받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다시 근원적 질문으로 돌아와 본다. 부, 권력, 학벌, 여행, 사랑, 취미, 열정 등 수많은 가치 속에 융합된 나는 누구인가? 이런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 온 사슬을 책임지고 유지하고 빛내기 위함인가? 결국 그렇다면 삶이란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되는 수단적 존재인가? 마치 나무인형을 만들고 그 인형에 옷을 입히고 보석을 채워주며 예쁘게 웃는 모습을 위해 그토록 힘겨운 실존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비가 내린다. 빗속에 잠겨있는 사람들의 검은 눈빛이 유리 빛처럼 투명하게 빗물을 타고 튀어 오른다. 오늘도 어김없이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이 극단적 방법인 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 속에서 존재하며 같은 하늘을 보고 빈 하루를 공존하고 있는 나는 지금도 누군가의 눈빛이 그리워 무엇을 찾는다. 혼자 하는 깊은 외로움이 지속될수록 대중의 달콤한 속삭임과 위로가 그리워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성은 결국 돈이고
상품이다
대중성은 마치 파도와
같아 한번 그 물결을
일으키면
너도나도 대중성의 흐름을
타고
묻지도 않은 채
그곳에 안착하게 된다
그리고
파도가 멈출 즈음
각자 어느 빈 해변에
쓸쓸하게 버려져
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