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밤이 조금씩 깊어간다. 나이가 들면 얼굴에 새겨진 인상에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하는데, 그의 삶은 보여지는 인상과는 너무 다른 길을 걸어온 것 같다.
"애들아, 너희들 공부는 재미있냐?"
"저희는 공부 잘 못해요."
"그래, 공부만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야. 살아보니 삶은 결국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더라고. 할아버지가 지금은 노숙자로 살고 있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공무원이었어. 정말 어렵게 몇 년 동안 공부해 고시 패스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런 곳에서 일을 했었는데 당시 군사독재에 맞서 투쟁 좀 하다 보니 바로 좌천당하고 얼마 후 파면처리가 되더라고. 그 이후로 세상도 싫고 작은 섬마을에 가 교회에서 일을 하며 보냈지. 그 사이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깨지고 더 이상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더라고. 그러다 교회에서 목사 한 분이 안 좋은 사건으로 쫓겨나면서 결국 나도 그곳에서 쫓겨나게 됐어. 그 섬을 나온 후 다시 서울로 가 안 해본 일 없이 살았던 것 같아. 그런데 이제 나이가 이렇게 들다 보니 어디 받아주는 곳도 없고, 아내는 나 때문에 그렇게 속앓이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아버지를 찾지도 않아."
안주도 없이 술만 연거푸 마시는 그의 입가에 미처 다 넘기지 못한 술이 흘러내린다. 머루가 옆에 있는 휴지를 건넨다. 검은테 안경 너머 짙은 눈썹 아래로 그의 두 눈이 감긴다. 그 아래로 눈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할아버지, 아마 자제분도 할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을 거예요."
"아니, 아들 녀석에게 그러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조차 미안한 일이야. 아버지라고 내가 뭐 해 준 게 있어야지."
"그래도 아마 할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할 거예요."
루머가 고개를 숙인다. 아마도 루머 또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그리움과 말 못 할 사연들로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애들아, 너희들은 삶을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먼 미래만을 생각하며 현재를 희생하지도 말고 주변의 틀에 갇혀서 진정으로 너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여행도 다니고, 많은 사람들도 만나면서 삶이라는 게 결국은 사람들 간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기를 바래. 공부만 잘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한 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본인이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 같아. 그러한 목적이 없으면 어떤 화려한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기는 어렵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관계와 경험이 중요한 거지. 젊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삶의 가치를 깨닫고 너희가 지향하는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해. 그래야 되도록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할아버지가 보기에 우리 루머와 머루는 착실한 학생인 거 같은데, 맞지?"
루머와 머루가 미처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그의 눈빛만을 멍하니 쳐다본다. 어쩌면 그는 우리 여행의 이유와 목적을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향하는 그의 말씀이 더없이 진지하게 다가온다.
"머루야, 머루는 한쪽 눈이 좀 아픈 거 같은데,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세상을 보렴. 누구나 살다 보면 어떤 사고가 생길 수 있고 몸에 상처가 날 수도 있단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외면적인 상처보다 그 상처를 보듬지 못하는 마음의 아픔이야. 할아버지는 우리 머루 눈을 보니, 참 마음이 아프지만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좀 더 당당하게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어. 의학기술이 엄청나게 발전되고 있으니, 머루의 눈도 수술하면 좋아질 수 있을 거야."
"네, 할아버지."
"루머는 꿈이 뭐야? 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할아버지, 왜 선생님이나 어른 분들은 학생들을 만나면 늘 꿈만 물어보나요?"
"그러게, 학생이니깐 묻고 싶은 거 아닐까?"
"네, 아직 없어요."
"잘 찾아봐. 루머에게도 멋진 꿈이 있을 거야. 꿈이란 말 그대로 꿈꾸는 것이야. 이루지 못해도 괜찮으니 마음속에 삶을 향한 소중한 보물 같은 거 하나를 담는 거와 같아. 이런 보물이 있는 사람은 눈빛부터가 달라져. 그리고 매일 하루하루가 설렘으로 가득하지. 그런데 꿈이 없는 사람은 마치 떨어진 낙엽처럼 힘없이 축 늘어진 채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돼. 그래서 꿈은 소중한 거야. 이루지 못하더라도 잘 찾아봐. 네 마음속에는 아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소중한 꿈이 반짝이고 있을 거야."
"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도 꿈을 갖고 싶지만 그 꿈을 꾸기 전에 부족한 제 현실이 눈에 먼저 선하게 다가와요. 그러면서 제 안에 꿈틀거리는 소중한 꿈을 자꾸만 억압하는 것 같아요."
"그래, 앞으로는 할아버지 말 잘 새겨서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그 자체로 마음속에 담고 누가 꿈을 물으면 당당하게 이야기하렴."
"네, 할아버지."
"그나저나 많이 피곤할 텐데, 이 늙은이 이야기 듣느라 잠도 못 자고 어서 쉬도록 하자."
"네, 할아버지도 편하게 주무세요."
"그래, 오늘 선생님이랑 너희들을 만나서 이 늙은이가 참 기분이 좋네. 고맙다. 선생님도 고마워요. 선생님도 편하게 쉬어요."
게스트하우스의 밤이 깊어간다. 불이 꺼진 방안에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그의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아이들의 고요한 숨소리가 깊어간다. 잠시, 그의 뒤척임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 그가 전해 준 이야기를 하나 둘 새겨보며 걸어갈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고위직 공무원으로 화려하게 살다가 삶의 바닥에서 바라본 삶 속에는 어쩌면 교과서나 책이 전해주지 못하는 가장 소중한 삶의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다. 루머와 머루의 꿈 속에 그의 소중한 이야기가 깊은 밤 고운 이야기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며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