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가르침

by 문객

루머와 머루가 웃는다. 그의 인상이 온화하고 정감 있어 보인다. 다행이다. 아이들도 비교적 그의 존재에 대해 어려워하지 않은 듯 각자의 침대로 가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실로 향한다.

"어르신은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나는 갈 곳 없이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네, 김광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요?"

"김광석 좋아하지. 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곡 있잖아.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죽은 아내 생각이 나."

"네"

"거기는 참 좋은 선생님인가 봐. 애들 데리고 여행도 다니고."

"아니요, 사연이 있는 여행이에요."

"사연이 있다고 해도, 학생들과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잖아."

"네"


루머와 머루가 씻고 들어온다. 1층의 침대 옆으로 아이들도 한 곳을 정한 채 앉는다. 중앙엔 작은 것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이 있다. 그가 가방에서 소주 한 병과 안주 몇 개를 꺼낸 채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선생님은 술 좀 하죠?"

"아, 네."

"이런데 와서는 한 잔 해야지 잠도 편하게 잘 수 있은 게 한잔하자고요. 너희들은 여기 과자 있으니 이것 먹고."

"네"

"애들아, 할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처럼 보이니?"

"교수 님 같은 인상이에요."

"저는 목사님 같기도 해요."

"선생님은?"

"글쎄요. 작가 같기도 하고, 중소기업 사장님 같기도 해요."

"하하, 내 인상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나보구려. 다들 좋은 면만 말하는 것을 보니. 솔직히 난 갈 곳 없는 노숙자야. 3년째 막노동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고 있어. 오늘 여기 숙소는 나에게 한 달에 몇 번 경험하지 못하는 아주 귀한 곳이지."

"네, 가족분들은 안계시나요?"

"아들 하나 있는데, 지 엄마 죽고 난 이후로 서울 살이하느라 바쁜지 내려오지를 안해."


그가 빈 잔에 술을 따른다. 그의 눈빛에 어느새 그늘이 깊어간다. 루머와 머루는 옆에 앉은 채 묵묵히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밤이 조금씩 깊어간다. 나이가 들면 얼굴에 새겨진 인상에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하는데, 그의 삶은 보여지는 인상과는 너무 다른 길을 걸어온 것 같다.


"애들아, 너희들 공부는 재미있냐?"

"저희는 공부 잘 못해요."

"그래, 공부만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야. 살아보니 삶은 순간순간의 과정이 중요하더라고. 할아버지가 지금은 노숙자로 살고 있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공무원이었어. 정말 어렵게 몇 년 동안 공부해 고시 패스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런 곳에서 일을 했었는데 당시 군사독재에 맞서 투쟁 좀 하다 보니 바로 좌천당하고 얼마 후 파면처리가 되더라고. 그 이후로 세상도 싫고 작은 섬마을에 가 교회에서 일을 하며 보냈지. 그 사이 아내와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해 바라던 신뢰는 완전히 깨지고 더 이상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더라고. 그러다 교회에서 목사 한 분이 안 좋은 사건으로 쫓겨나면서 결국 나도 그곳에서 쫓겨나게 됐어. 그 섬을 나온 후 다시 서울로 가 안 해본 일 없이 살았던 것 같아. 그런데 이제 나이가 이렇게 들다 보니 어디 받아주는 곳도 없고, 아내는 나 때문에 그렇게 속앓이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아버지를 찾지도 않아."


안주도 없이 술만 연거푸 마시던 그의 입가에 미처 다 넘기지 못한 술이 흘러내린다. 머루가 옆에 있는 휴지를 건넨다. 검은테 안경 너머 짙은 눈썹 아래로 그의 두 눈이 감긴다. 그 아래로 눈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할아버지, 아마 자제분도 할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을 거예요."

"아니, 아들 녀석에게 그런 기대를 갖는 것조차 미안한 일이야. 아버지라고 내가 뭐 해 준 게 있어야지."

"그래도 아마 할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할 거예요."


루머가 고개를 숙인다. 아마도 루머 또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그리움과 말 못 할 사연들로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애들아, 너희들은 삶을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먼 미래만을 생각하며 현재를 희생하지도 말고 주변의 틀에 갇혀서 진정으로 너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여행도 다니고, 많은 사람들도 만나면서 삶이라는 게 결국은 사람들 간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기를 바래. 공부만 잘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한 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본인이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 같아. 그러한 목적이 없으면 어떤 화려한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기는 어렵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관계와 경험이 중요한 거지. 젊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삶의 가치를 깨닫고 너희가 지향하는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해. 그래야 되도록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할아버지가 보기에 우리 루머와 머루는 착실한 학생인 거 같은데, 맞지?"


루머와 머루가 미처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그의 눈빛만을 멍하니 쳐다본다. 어쩌면 그는 우리 여행의 이유와 목적을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향하는 그의 말씀이 더없이 진지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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